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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타나 기차역 건물과 그 앞의 조형물.
ⓒ 김준희
일반적으로 '여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자유와 낭만, 일탈, 설레임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배낭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구체적으로는 불안함과 긴장, 육체 및 정신의 피로 심지어는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말 안 통하는 곳을 혼자서 여행하다보면 더욱.

익숙한 곳을 떠나서 낯설고 새로운 것과 부딪혀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일 텐데, 여기서 새로움이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길, 새로운 음식 등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접하는 모든 것을 포함할 것이다. 걸어서 실크로드를 여행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긴다'고 말했던 것처럼.

여행 중에 마주치는 많은 것들을 항상 적극적이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문제는 이런 새로움이 언제나 즐거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평소에 일상적으로 해오던 많은 것들, 먹고 자고 열차를 타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이런 일조차 여행 중에는 긴장의 대상이 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여행 중에는 긴장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습관이 된다.

그리고 이 긴장이 새로운 것을 접할 때의 즐거움과 호기심을 능가하게 되면 그때가 여행에 지쳐가기 시작하는 지점이 된다. 이런 긴장이 쌓이다보면 여행을 끝내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 정도로. 이때쯤 되면 새로움은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다른 것'에 불과해진다.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여행일 텐데, 여행속의 일상에 지쳐가는 현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 같은 거 없어요?"

중앙아시아로 배낭여행 간다고 했을 때 예전 직장동료가 했던 말이다.

"두려움 있죠. 하지만 두려움 보다는 호기심이 더 크거든요"

난 그냥 이렇게 대답했었다. 정보도 별로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곳으로 혼자서 떠나는데 왜 두려움이 없을까. 상대방이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함, 난처한 상황에서 내 입장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함, 좀더 극단적으로는 만만해 보이는 여행자를 위협하는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다만 중앙아시아에 대한 욕망과 호기심이 강했기 때문에 출발 전의 그 두려움을 억눌렀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당시에 내가 간과했던 것도 한 가지 있다. 호기심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행 중에 쌓여만 가는 긴장과 정신적인 피로를 이겨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 아스타나의 거리.
ⓒ 김준희
그리고 이런 피로를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고독이다. 혼자있는 것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나지만,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한 채 한달 가까이 지내다 보면 혹시 어디서 한국인을 우연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처지가 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혼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러시아어를 간신히 읽을 줄 아는 정도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말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몇 가지 인사말과 간단한 단어 그리고 숫자가 고작이다. 이걸로는 현지인과 대화는 커녕 지금까지 별탈없이 먹고 자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러니 현지인과의 소통은 거의 '바디랭귀지' 수준을 넘지 못할 수밖에.

낮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경치좋은 곳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도, 저녁을 먹고 8시가 넘어서 숙소에 돌아오면 그때부터는 혼자 보내야하는 긴 밤이 날 기다리고 있다. 배낭여행자가 많은 곳이라면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어울리기라도 할텐데, 이 지역은 그렇지도 않아서 나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그럴 때는 그냥 어서 빨리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침이 오면 최소한 다른 사람들 틈에 섞일수라도 있으니까.

"우즈베키스탄하고 카자흐스탄은 많이 달라"

발하쉬에서 아이굴이 했던 이 말이 떠올랐다. 카자흐스탄의 일부만을 여행하고서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마는, 내가 느낀 것도 아이굴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즈베키스탄에 많던 양고기 볶음밥과 양고기 국 대신에 카자흐스탄에는 샤슬릭과 삼사가 많고, 전통복장을 입고 다니는 현지인들보다는 현대적인 패션의 젊은이들이 많다. 우즈벡에 널려있던 이슬람 풍의 건물보다는 러시아를 연상시키는 그런 건물이 많고, 고전적인 바자르보다는 현대식의 마켓이 많은 느낌이다.

알마티로 돌아온 나는 한우리 민박집에서 이틀을 쉬면서 키르키즈스탄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 이틀 동안 난 이발을 하고 목욕을 해서 때를 빼고, 치약과 화장지등 앞으로의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그리고 밀린 빨래를 하고 그동안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인터넷을 통해 한국으로 보냈다. 한우리 민박집에 있으면 편하긴 한데, 편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민박집의 박 사장님은 직접 승용차로 날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셨다. 이곳에서 합승택시를 잡아타고 키르키즈스탄의 수도인 비쉬켁으로 가야 한다. 어찌 보면 키르키즈스탄이야 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인지도 모른다. 키르키즈스탄에는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한국인 민박집도 없고 한국인 여행사도 없다. 하다못해 한국 대사관도 없다. 막말로 해서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비빌 언덕이 없는 것이다.

터미널에서 박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비쉬켁으로 가는 합승택시를 탔다. 현지인 3명과 함께 탄 이 택시의 요금은 1인당 1500팅게(팅게는 카자흐스탄의 화폐단위. 1달러는 약 130팅게). 이제 키르키즈스탄으로 간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 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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