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6일 서울공항으로 귀국해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백승렬

19일 당선 3주년을 맞이했건만 청와대는 너무도 조용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특별한 외부일정이 없었다. 이날 노 대통령이 한 일이라곤 열린우리당과 한 청소년 행사에 축하메시지를 보내고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한 것뿐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속마음이 평온할 리 없다.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의 연구진위 논란과 높아지는 김병준·박기영 경질 요구, 문재인 민정수석 사의 표명, 사학법 개정안 통과로 인한 여야 대치, 잇따른 시위참가 농민 사망 등등…. 청와대 안팎의 상황은 그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었다.

"원칙을 지키면 반드시 성공한다"... 노 대통령의 원칙은?

이날 노 대통령이 '2005년 청소년특별회의' 행사에 보낸 축하 메시지 중에 이런 구절이 기자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게 행동하십시오. 절제와 인내가 필요하고 때로는 난관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승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물론 청소년들에게 던진 충고겠지만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노 대통령이 자신에게 건넨 화두일 수도 있고, 줄기세포 연구 논란에 휩싸인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에게 던진 충고일 수도 있겠다.

또한 노 대통령은 이날 열린정책연구원(열린우리당의 싱크탱크)의 정책계간지 <열린미래> 창간 축하메시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 그는 "열린우리당은 자기희생을 각오한 결단 위에 세워졌고 변화를 통해 선진적인 정당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앞서서 나아가는 만큼 고민과 진통이 있지만 스스로 원칙을 지키고 열심히 참여하고 책임있게 행동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이 역시 여당에 던진 충고겠지만 노 대통령 자신에 대한 다짐처럼 느껴진다. 원칙을 지키면 반드시 성공한다? 좋은 말인데 그렇다면 그가 지키고 있는 원칙은 무엇일까?

경찰 진압에 농민 죽었는데도 시위문화 문제삼는 대통령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부터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두 가지 민감한 현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하나는 시위참가 농민들의 사망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학법 개정안에 관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한달 사이에 두 명의 농민이 잇달아 사망한 데 대해 "매우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앞서 이해찬 국무총리도 공식사과문을 발표했다. 정부가 경찰폭력에 의해 숨진 시위 참가자에게 공식 사과한 것은 8년 만이라고 한다.

이어 노 대통령은 "이번 일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밝혀야 한다"며 "규명된 원인과 밝혀진 책임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당히 센 발언이었다. 농민단체들이 요구하고 있는 허준영 경찰청장의 파면까지 고려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반전 드라마'를 연상시킬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TV를 통해 폭력장면을 보고 아찔했다. 저러고도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돌아가신 농민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현장에서 대응하는 전경과 의경들도 우리의 자식이다. 이같은 시위문화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돌발사태가 발생하지 않으리나는 보장이 없다. 앞으로 평화적인 집회시위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제도적 문화적인 근본방안을 마련하라."

경찰의 진압방식보다 농민들의 시위문화에 더 문제가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익히 들어온 얘기다. 이는 권위주의 정부 시절 '폭력시위문화 척결' 주장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농민들의 분노와 슬픔, 좌절의 깊은 속내까지 들여다 보려는 시도는 그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 지난 1일 열린 전국농민대회에서 농민들이 노무현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광화문네거리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사학법 위해 종교계 지도자 초청한 대통령, 농민 문제에는 왜

그런데 농민들의 잇따른 사망사건에 대한 태도와는 달리 노 대통령은 사학법 개정안에 대해서만은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날 그는 사학법 개정안 공포(24일)를 앞두고 오는 23일 종교계 지도자를 만나겠다고 밝혔다. 일부 종교사학들이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한 사학법 개정안에 반발하고 있다는 상황을 고려해 대통령이 직접 중재에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에게는 농민들의 사망사건보다 사학법 개정안이 더 중요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원칙을 지키면 성공한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당선 3주년을 맞은 지금 그가 지키고 있는 원칙은 무엇일까?

기자는 이런 상상을 해봤다. 노 대통령이 당선 3주년에 사망한 시위농민을 문상하러 갔다면 어땠을까라고. 그가 이벤트 행사를 극도로 싫어하는 스타일이라는 건 잘 알지만 농민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문상 이벤트'라도 벌였어야 하는 건 아닐까?

외국 방문 중에도 인터넷에 접속해 댓글을 다는 노 대통령이, 사학법 개정안에 대한 반발을 우려해 종교계 지도자를 청와대로 초청하는 노 대통령이 왜 우리 모두의 뿌리인 농민문제에 그렇게 무관심한 것일까? 정말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