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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 눔의 새끼, 누가 이런 짓 하라 그랬어?"

차승원이 돈 밝히는 교사로 나와 열연했던 <선생 김봉두>에서 많은 관객들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했던 말이다. 차승원이 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차승원을 좋아하던 학생이 차승원에게 돈을 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돈을 차승원에게 준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정신 이상으로 자기 앞가림 하기도 힘든 제자가 그렇게 만들어온 돈 앞에, 학부모 앞에서 '돈, 돈'하던 차승원도 제자 종아리를 매로 내리치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만다.

그리고, <선생 김봉두>의 후속편격인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교사로 나오는 염정아는 애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은 없고,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큰 도시로 나가 교사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가 주요 관심사다. 염정아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학생이 있지만(영화적 재미를 위해서였겠지만), 그저 젊은 미남 선생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경쟁자로만 인식하다 나중에 극적 계기를 통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회복을 이루어낸다.

이 두 영화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교사의 상은 존경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학부모나 제자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주는 존재이며, 또는 무관심한 존재로 그려진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그런 교사를 만들어낸 것이 교사의 자질 문제일까? 아니면 돈을 집어주는 학부모의 문제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런 여건이라고 밖에 여길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일까?

촌지 받는 교사...교사, 학생, 학부모 중 누구의 문제일까

난 그 답을 조금이라도 알고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을 읽어보았다. 예전에 도올이 TV에 나와 강의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좋아하던 프로그램마저 안 보고 들었을 만큼 그를 좋아했었다. 들을 가치가 있는 말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난 세 번 정도 듣고 부모님이 아무리 권유해도 다시는 도올의 강의를 듣지 않았다. 지나치게 일방적인 느낌이 들고, 그의 말에 반박하면 그 사람이 무식한 것처럼 느껴지는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이다.(이는 개인적 감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를 꼭 해야겠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중간 제목을 보고 난후 글을 쓰지 않고서는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견딜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도올의 글은 상당히 논리정연하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등장하여, 그 덕분에 당연히 그의 주장이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결정적 실책이 있다. 이론과 경험은 일치할 수 없으며, 책 속에 나온 이론들이나 사상들을 현실생활 속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난 도올보다 교원평가제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잘만 설명해주면 머리로는 현 교원평가제 도입이 그대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은 그런 설명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이 때에, 과연 누가 교원평가제에 대해 사회구조적 문제까지 다 들추어가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싶어하겠는가. 젊은이들은 취직을 하기 위해, 삼사십 대는 짤리지 않기 위해, 오륙십 대는 직장에서 나와 성장한 자녀들 결혼문제 등에 직면해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 때 그런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으로 무장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러다보니, 보통 사람들은 헤드라인이나 신문에 나온 기사 몇 번만으로 '교원평가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아주 간단히 말해 교사를 평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교원평가제에 대해 해야 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많다. 도올의 글을 보면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데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 왜? 무엇 때문일까?

안 그런 사람 있겠냐마는 나 역시 초등학교 때 반장을 5번이나 해보았고, 공부도 잘했다. 그리고 선생님들 모두 나를 예뻐하셨다. 그때는 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조금 커서 우연히 어머니의 가계부 한 켠에 쓰여진 일기를 보고 나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는 이렇게 써져있었다.

'중모 담임이 사과가 먹고 싶단다. 사과 한 박스 사오라는 거겠지. 지겹다 정말. 그래도 어쩌랴. 우리 새끼 미움 받지 않으려면.'

무척이나 나를 예뻐했던 선생님이었기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결국 어머니에게 그 일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돌아온 어머니의 답변은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아, 그거, 너 초등학교 때 한 명 빼고는 다 돈 갖다줬지."

그리고, 그제서야 초등학교 때 이해할 수 없었던 몇 사건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한 학년 올라가 스승의 날에 순수한 마음에 선생님에게 편지만을 갖다 주었을 때 고맙다는 말도 안하고, 귀찮은 듯한 표정, 언젠가 시험볼 때 내게 틀린 문제를 손가락으로 짚어주어 고치게 해주었던 선생님 등, 하나 둘 나이를 먹으면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일이 바로바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초등학교 때만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도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잡히다, 어머니가 한 번 왔다 가시자 대우가 달라지는 등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오게 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돈을 갖다준 우리 어머니도 잘못이 아니냐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돈 대신 끝까지 박카스 한 박스로 버티던 친구 녀석이 그 학년이 끝날 때까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잘못을 저지른 편이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이제 다들 알 것이라 믿는다. 도올이 말한 바로 우리들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동안, 그 중 어떤 스승들은 그런 존경을 권력으로 바꿔치기 하여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분노를 차곡차곡 쌓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등장한 교원평가제는 그 차곡차곡 쌓아 담아왔던 분노를 더 이상 담지 않고, 바로 교사를 향해 겨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촌지 준비한 어머니

도올 선생은 지금도 인터넷 등을 이용해, 교사의 만행을 고발할 수 있지 않냐고 말하지만, 결코 그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의 비리에 대해 진정을 넣었다고 자퇴하라고 강요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학생에게 압박을 가하는 우리 현실에서 만용이나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닌 이상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이성보다 감정의 논리에서 많은 이들은 교원 평가를 거부하는 교사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일부러 자신의 별명이 '싸대기'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별 잘못도 없는 애를 불러 뺨을 때리는 등의 비정상적 교사에 대한 분노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교사들을 포함한 교사 전체들에게 옮아가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건 오로지 감정의 문제이니까, 반론으로 부적합하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부족한 줄 알면서도 도올이 교원평가제에 대해 반대한 근거들에 대해 부족하나마 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도올의 첫 번째로 '여기 평가라고 하는 것은 객관화될 수 있는 수량적·계량적 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교사라는 인격체는 그러한 방식으로 평가될 수도 없고, 평가되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마땅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고교생들에 대한 평가부터 다 집어치우게 만들어라. 그건 다른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가? 교사는 인격체이고, 학생은 인격체가 아니었던가.

난 일생에 단 한 번 본 수능 점수를 통해 평가받았고, 그를 통해 들어간 대학교를 통해 남들의 인식에서 평가되어져 왔다. 대입이라는 현실적 문제 앞에서 과연 학생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는 게 가능한가? 학생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교육에 한 몫을 담당했다면, 마땅히 그 평가를 잘 받을 수 있게 해주었는지에 대해서도 학생들이 평가할 권리조차 없단 말인가?

도올의 두 번째로 교원평가제 반대 이유로 '저질적 교사의 징계에까지 이르는 법적 효력을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원평가제가 법적 효력을 노리고 시행되는게 아니라는 점은 잘 알텐데,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다. 교사를 법적으로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함량 미달의 교사라면, 그 교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한 수단이라도 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도올의 세 번째 주장은 '교원평가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새삼 숙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오는 내용은 학생들이 뒤에서 쑥덕거리는 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애들끼리 모여서 불만을 얘기할 뿐이지, 그것이 교사의 행동 변화를 유발할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선생이 하는 강의에 대해 불만이 있어 쑥덕거리는 게 충분한 교원평가인가, 그리고 그것이 교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도올의 네 번째 주장은 '교원평가제에 관하여 학부형들은 모두 찬성하고 있고 교사들만이 저항하고 있다는 여론은 근원적으로 매스컴의 정보조작에 의한 호도된 인상'이라는 것이다. 매스컴이 그렇게 만들어 보인 면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 뒤에 오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들도 이상하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의 학교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참여하는 학부모는 훌륭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그런 논리라면 잘못된 학교 교육에 대해 입다물고 있으면 좋은 부모이고, 잘못된 학교 교육에 저항하는 경우에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참교육에 대한 열망', 교사들에게 있다고 나도 믿는다. 그러나, 앞서 보통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적인 문제에 대해 길게 언급한 건, 그렇게만 느끼기에는 학부모나 학생들이 너무 오랜 시간 억눌려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도올은 다섯 번째로 '우리가 우려한 중고등학교의 부정한 실태는 교육제도의 문제이며 교원의 내면적 도덕성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그럴 듯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해서는 안되는 주장이다. 촌지를 받고 안받고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교원의 내면적 도덕성이 가장 큰 열쇠다. 우려하고 있는 건, 오로지 사교육 시장이 커지는데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도올은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난 시간 동안 부도덕한 교사들을 많이 봐온 내 입장에서 교원의 내면적 도덕성을 우려하지 말라는 주장은 절대로 승복할 수 없다.

도올은 여섯 번째로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대학의 서열화와 사회진출의 학벌패거리의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 제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교원평가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약간은 빗나간 주장이 아닐까. 그 문제를 해결하면 교원 평가의 문제도 과연 해결될까?

도올의 일곱 번째 주장은 '평가가 자질을 향상시키지는 않는다'라는 것이다. 도올이 말한 자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이라면 현재 이루어지고 교육 체계를 다 부수어버려야 한다. 사람은 때론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목표를 정하기도 하고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며 긴장감을 느끼기도 한다. 언제나는 아닐지라도 평가가 자질을 향상시키는 경우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도올은 여덟 번째로 '교원평가제에 관한 나의 논의는 결국 우리사회의 미래모습에 대한 총체적 블루 프린트와 관련되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도올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맨 마지막에 있는 '내가 학생에게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비굴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나는 가르치기를 포기하거나 죽음을 택할 것이다'이라는 구절에서 그와 내가 결코 융합할 수 없는 지점을 찾아내었다.

교원의 내면적 도덕성 우려 말라는 주장 절대 승복할 수 없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획일적 잣대로 인권을 침해하는 제도인지, 아니면 스승을 제자가 평가하겠다고 덤벼 드는게 싫다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느껴지지만, 글을 다 읽고서 든 생각은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다. 중고교 교사보다 더한 철밥통인 교수들 역시 대학생들이 갈망해 바라지 않는 교수평가제에 대해 이런 저런 이유로 부당함을 주장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도올이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더욱 정확히 느껴지는 셈이다.

도올이 쓴 내용 중간에는 주입식 교육이 더 좋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중고교를 지나 성인으로 인정받은 대학교 때까지,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를 듣고서 그에 대해 말하고 제대로 평가할 기회조차 가져서는 안되는 그런 존재란 말인가.

학생에게 교사나 교수의 강의 자율권이 침범당해, 하고 싶은 교육을 못하는 것이 문제이며, 또 인권침해로 발전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겠지만, 배우는 입장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일 수 있음을 도올 선생께서 느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성보다 감성에 의존하고 있는 학생이나 학부모는 결코 가르치는 이들의 입장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정작 돈까지 내가면서 듣는 이는 그에 대해 평가할 권리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쁜 부모이며, 훌륭하지 못한 학생이라고 낙인찍힌다면 그건 도올 선생이 생각하는 그런 이상적이고 훌륭한 교육 시스템인지 되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전교조에서 말하고 있는 부분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전교조 스스로 충분한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이해를 얻지 못하는 모습이 결국 일부 정말 퇴출되어야 할 교사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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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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