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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태
목마름 6

기다림에 지친 나의 젊음이
따가운 칠팔월 햇빛에 그을린 호박잎처럼
축 늘어져 있다.
아니, 어쩌면 핏기 없는 낙엽처럼
바짝 시들어 바람이 불면 아무렇게나 뒹구는
창백한 가을인지도 모른다.

번번이 물거품으로 끝나는
나의 사랑탑!

언제쯤 진정 기다린 보람이 있어
석류 같은 사랑을 낳게 될까?
얼마만큼 가슴이 더 아파야만
꽃피는 봄날을 해산할 수 있는 걸까?

목마름 7

고독을 벗어나 보려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더 나를 사로잡는 고독
마치 덫에 짐승이 발버둥칠수록
점점 그 생명을 조여 오는 것처럼

아, 나의 사랑이여!
고독에 빠져 죽어가는
이 꽃봉을 구하소서

목마름 8

아름드리 느티나무 가지 끝에서
부쩍 수척해진 노을이 발갛게 타고 있다
어쩌면 저것은 내 젊음의 표백인지 모른다

참으로 다른 사람을 바로 사랑하기 위해서
적어도 지금은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할 때다
나도 하나 사랑 못하면서
남을 진실로 사랑하기는 어려우니까

목마름 9

여러 사람을 향한 많은 사랑도 좋지만
왜 그런지
오늘은
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사랑이 그립다

목마름 10

이제는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날개짓 대신
고요한 호수처럼
반짝이는 기다림으로 채우겠습니다
고즈넉이
나머지 나의 젊음에


어때요? 너무 우습고 유치하기 짝이 없지요? 지금 읽어보니까 약간은 그러네요. 하지만 그때 당시의 저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하고 가슴 아픈 나날이었습니다.

초희씨와 늘 강의를 같이 듣는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말도 건네고 참으로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참으로 한이군요.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도 있다고 이렇게 글월로나마 초희씨에게 제 마음을 토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펜을 놓고 정확하게 3일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밤이 많이 깊었습니다. 창 밖으로 온천장의 네온 사인이 점점 밝은 빛을 발하는군요. 그런대로 유성의 밤은 운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 동안도 주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총이 늘 함께 하길 두 손 모으며, 총총난필로‥‥‥.

84년 4월 10일

초희씨를 다시 만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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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희씨에게 드리는 세번째 글월

그리움 1

오늘밤
창틀을 베개 삼고 하얀 창을 안경 삼아
까망 밭에 피어나는 푸른 진주들을 모아
'누구'의 얼굴을 징검다리 건너듯 수놓기 시작한다
한 올 한 올 곱고 예쁘고 아름답게
탐스런 복숭아처럼, 한 떨기 장미꽃같이, 우아한 여왕의 자태 닮은
사랑의 실과 행복의 바늘로 뜨개질 한다

바람도 입을 다문 채 말이 없고
초목들도 숨을 죽이며 소리 없는 웃음으로 손과 손을 포갠다
구름이 이따금씩 훼방하고 지나갔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마음 뿌려 수를 놓는다

이윽고
까망 호수에
무지갯빛 수련이 옷을 벗는다
이제껏 질투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만월이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고 꼬리치며 도망한다
모두들 입술을 크게 열어 나팔을 불다

'누구'의 얼굴을 조심스레 가위로 오려내어
사뿐 사뿐 내방으로 날라 온다

나의 가슴 속 깊이 품고 나도 하나의 얼굴이 되어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사랑과 행복으로 배부른 세계를 향해
꿈의 여행길에 올라 보지만

그러나 꿈은
꿈일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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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지만 초희씨를 생각하며 적어 본 시(詩)입니다. 마음에 드는지요? 그리고 첫번째, 두번째 편지는 모두 다 잘 받아보았는지요? 무척 놀랐죠? 아니 황당했나요?

너무 놀라게 해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황당하다고 느끼셨다면 안심하십시오. 장담하건대 장난 편지는 아닙니다.

오늘은 저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보낸 편지들에서 약간씩 언급했듯이 저의 고향은 충남 논산 양촌입니다. 거기에서 중학 시절까지 보냈습니다. 그리고 D고교를 거쳐 지금은 짐작하시겠지만 초희씨가 입학한 대학에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식구가 많습니다. 엄격하신 할아버님, 인자하신 할머님, 부지런하시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교육열이 강하신 부모님, 지금은 군에 가있는 형님, 직장에 다니는 누님, 그리고 동생 셋. 또 이웃에는 삼촌, 사촌, 오촌 친척들이 병풍처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선비 집안이었답니다. 따라서 유교적 가풍이 매우 강한 편입니다. 조부님께서는 이 시대 마지막 선비를 자처하시지요. 그래서 예의범절을 보통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문을 중요시 하셔서 삼촌, 형님은 물론 저도 어렸을 적부터 조부님 밑에서 논어, 맹자를 읽었지요.

저희 조부님께서는 마을의 촌장 또는 장로로 통하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집안일보다 마을일에 더 열심이십니다. 마을 대소사에 늘 배 놔라 사과 놔라 하십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저희 조부님을 모두들 '어르신! 어르신!' 하면서 극진히 모시고 따른답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읍내 사람들에게까지 평판이 좋으신 조부님께서 그러나 정작 아버지 형제들로부터는 그리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고요? 너무 엄격하게 자식들을 대하시는 데다 이상하리만큼 자식들 교육에 소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숙부님들이나 고모님들은 늘 그것이 불만이지요. 저희 아버님도 예외는 아니고요. 그래서 언제가 제가 조부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왜 남들처럼 신식 교육을 시키지 않으셨냐고요. 그랬더니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나는 구한말에 태어나 그야말로 격변기를 살아왔다. 왜놈들이 쫓겨나자 소련군이 몰려들더니 곧바로 미군정이 시작되고, 그리고 좌우로 나뉘어 이전투구를 하더니 끝내 6·25를 겪더구나. 주로 누가 많이 다쳤는 줄 아냐? 소위 신식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이었어. 친일을 한 것도 그들이었고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면서 박 터지게 싸운 것도 그들이었다.

배우게 되면 다들 배운 티를 내느라고 앞장을 서는 게지. 그러다 제 명대로 못살고 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아주 집안이 몰락하거나 심지어 한 사람 때문에 아예 집안 식솔 모두가 몰살당한 경우도 있었지.

네 애비나 삼촌들은 그걸 잘 몰라. 그리고 어디 가서 살든 인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나는 종놈들한테 멱살 잡힌 양반도 보았고 아예 머슴 놈들의 죽창에 찔려죽는 지주들도 보았지. 시대가 어수선할 때는 그저 이렇게 산속에 파묻혀 농사나 지으며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이 천수를 누리고 집안을 보존하는 첩경이니라."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씀이셨지만, 아버님 입장에 서면 얘기는 또 달랐지요. 동네사람들에게는 인심 좋기로 소문난 조부님께서 정작 집안 경제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은 늘 궁핍했지요. 누구는 배운 덕에 출세하여 군수를 하고 누구는 경찰서장을 하며 큰소리 땅땅치며 사는데, 아버님 형제들은 신식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죄로 땅만 파며 숨죽여 살아야 되었으니 어찌 불만이 아니었겠어요.

저희 아버님도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저희 6남매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쳐 보려고 그 열정이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십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손을 놓는 법이 없지요. 콩팥이나 심어 가지고는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며 담배, 양잠, 딸기, 인삼농사‥‥‥

거기에 한우 사육까지 경제적으로 이익이 많이 나는 것이라면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 아버님의 생각이셨지요.

저는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조부님과 아버님, 부자간에 이렇게 추구하는 방향이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환경 탓일까요? 시대 탓일까요? 저는 또 어떤 가치관을 정립하고 살아가게 될까요?

저는 우리 집안에서 돌연변이입니다. 왜냐구요? 유일하게 기독교 신자거든요. 조부님께서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시지요. 저는 원래 신학대학을 곧바로 가려 했으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한발 물러서 일반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졸업 후에는 제 길을 찾아 신학대학원에 갈 계획입니다. 물론 저의 장래 희망은 목회자 또는 신학대 교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의 취미이자 특기라면 글 읽기와 쓰기, 그리고 음악 감상과 연주입니다. 서툰 솜씨지만 다음에 초희씨를 만나면 기타 연주를 한번 멋지게 해드겠습니다.

오늘 저에 대한 설명이 너무 장황했나요. 죄송합니다. 두서없이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앞으로 2통 정도 편지를 더 보낼 생각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3일에 한번씩을 꼭 과사무실 우편함을 들러 제 편지로 하여금 너무 기다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럼 끝으로 저의 졸시 몇 편을 들려드리며 이만 펜을 놓을까 합니다. 좋은 꿈꾸십시오.

84년 4월 16일

초희씨에게 한발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 10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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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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