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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동안 논란이 되어온 DTV논쟁이 우리 사회가 남긴 것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글입니다. DTV논쟁이 치열했던 만큼 이 논쟁이 남긴 것에 대해서도 의견은 다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은 나름대로 글쓴이가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한 것으로 <오마이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나 다른 의견을 기다리겠습니다...<편집자주>

▲ 정보통신부 라봉하 방송위성과장이 DTV합의사실을 발표하고 있다.
ⓒ 정보통신부
DTV에 대한 4년간의 논란이 지난 8일 정부와 언론노조를 포함하는 4자간의 합의를 통해 종결되었습니다. 이미 연재기사를 통해 DTV 논란에 대한 기사를 연재한 바 있는 시민기자로서 저는 이번 논란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고,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를 짚어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 이 기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IT 기술이 과학기술자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의 실생활에서 뗄 수 없는 존재로 이미 자리매김한 21세기에 앞으로 유사한 논란이 이어질 것은 명확하고, 그때마다 이러한 논란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이번에 낸 비싼 수업료를 그냥 버린 셈이 될 것입니다.

DTV논쟁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지난 4년간의 DTV논쟁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DTV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왜곡되고 핵심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파급되어 왔는지 보게 됩니다.

2000년 당시 최초로 8-VSB방식의 디지털방송 표준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한국방송기술인협회였습니다. 방송국 기술전문가들인 이들은 기술적인 관점에서 8-VSB가 수신율과 이동수신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 대안으로 유럽에서 채택한 COFDM으로의 변경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회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합니다. 그것은 DTV에 관련된 기술 용어들이 지나치게 전문적인 영역인 데다 아직 DTV가 대중에게 보급되기 이전이라 보지도 못한 DTV에 관심이 없을 때였기 때문이죠.

상황이 바뀐 것은 방송기술인협회에 방송사 노조와 한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가세하면서부터입니다. 뉴스의 생산자인 이들은 기술 문제보다 보급가능성과 같은 사회 문제를 부각해 단숨에 DTV를 뜨거운 감자로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실제 논의해야 할 기술 문제는 뒤로 빠지고 사회 환경 관련 문제가 더 부각됩니다. 즉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한 결정이라든지, 일부 재벌의 로비에 따라 정해진 표준이라든지 하는 자극적이고 증명할 수 없는 논란들이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8-VSB나 COFDM이라는 용어 대신 '미국식'과 '유럽식'이라는 말이 정착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는 2003년 들어 방송사들과 시민단체 그리고 진보적인 언론들이 변경론에 가세하면서 더욱 가열됩니다. 방송사들은 대중적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균형감각 없이 전달했고 시민단체들의 가세는 변경 주장의 도덕적 설득력을 높입니다. 마지막으로 진보적 언론들의 일방적인 보도는(비록 그들이 직접 언급하진 않았음에도) 앞에서 언급했던 음모론을 증폭시키고, 현행유지론에 '보수적'이라는 레테르를 붙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기술 논의는 실종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기술 전문가들은 이러한 과열된 사회적 논란과 관계없이 기술에 관해 토론해 합의점을 이끌어냈습니다. 즉 변경론자들이 현행 방식의 4년간의 기술적 진보를 인정하고 정보통신부도 일부 미흡한 부분에 COFDM 방식의 장점을 수용하는 선에서 합의를 한 것이 현재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란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균형감각', 다시 말해 기술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의 균형감각입니다. 이번 DTV 사안은 한 마디로 사회적 담론이 기술 논의를 완전히 압도해버린 잘못된 사례입니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데는 모두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 기술전문가들은 기술 논쟁에 매몰되어서 대중에게 사안의 핵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DMB나 HD, SD 라는 말조차 생소한 대중에게 '멀티패스'논쟁은 저 먼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반면 언론, 시민단체 등은 사안에 대한 최소한의 기술적 이해나 정보사회적 관점도 없이 단순히 제기되는 사회적 담론에 이리 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주로 정보통신 마니아와 이공계 출신인 현행 방식 유지자들이 일관되게 기술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한 반면, 언론노조가 중심이 된 변경론자들은 상호 모순되는 기술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의 주장을 마구 쏟아내었습니다. 그럼에도 언론과 사회단체는 이러한 철학적, 정보사회적 관점의 부재를 지적하기는커녕 일방적으로 옹호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저렴한 보급을 위해 유럽식을 하자'는 전형적인 사회적 관점과 '기술이 발전되면 가격이 떨어질텐데 지금 비싸다고 유럽식의 이동수신을 포기할 건가'라는 기술적 관점이 동시에 주장되는 터무니없는 글조차 여과없이 실릴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입니다.

이공계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다양한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번 DTV 논란이 이에 대해 한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영역을 벗어난 부분에 대한 이해의 부재'입니다.

과학기술자들이 '공돌이'라고 스스로 비하하는 데서 드러나듯, 기술의 사회적 영향이나 그 파급력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주어진 과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수행하기에 바쁩니다. 목적의식 없는 연구는 당연히 의욕을 주지 못하며, 낮은 임금과 인센티브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겨우 성과를 내더라도 그것은 최초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결과물을 잘 포장해서 수익을 낸 고용주들에게 돌아간다는 피해의식이 이공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반면, 언론이나 정책결정자, 경영자와 같이 이공계를 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 그리고 일반 대중은 기술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이들은 그 중요성을 망각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이해에 기반해 중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그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상호 괴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기술자들은 과학철학이나 정보사회학에 대해 이해하고, 사회 쟁점에 대해 이해력을 높여야 합니다. 또 일반 대중이나 여론 주도층에게 과학기술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여론주도층들은 무책임한 결정에 앞서 역시 과학적 지식과 그 철학에 대해 충분히 공부해야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DTV 논쟁으로 돌아와서, 일부 현행방식 유지론자들은 "차라리 '인터넷'이나 '이동통신'처럼 밀실에서 정책이 결정되었다면 이런 낭비는 없었을 것이다"며 극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관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번 DTV 논쟁은 전문 분야에 대한 정책이 좀더 투명하게 결정되는 선례를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에 치른 비싼 수업료를 다음에는 다시 치르지 않도록 철저하게 복습하는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DTV 논란이 합리적으로 마무리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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