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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기자가 지난 7월 16일 미군부대 고압선에 감전돼 사지를 절단한 전동록 씨와 그의 가족들을 지켜보며 쓴 글입니다. 이글은 그 세번째로 이전기사는 글 끝의 '이어지는 이전기사'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11월 2일 서울 민사지법 358호 법정.

"다음 재판은 11월 30일 2시에 합니다. 그때는 심문 종결합니다."

판사의 말과 함께 이번 재판도 아무런 결론없이 끝나고 말았다. 10월 12일 첫 재판이 시작된 이래 벌써 두 번째다. 피신청인인 정부와 건물주가 대리인을 통해 변론을 준비할 시간을 더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미군측에 사건에 대한 사실조회를 의뢰했는데 결과를 받으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고, 건물주 역시 사건기록을 검토하고 답변서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건물주는 지난 재판 때 법원 서류를 받지 못해 불출석 하였다가 이번에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그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병원비가 없어 퇴원도 못해

얼마나 기다려 왔던 재판인데, 또 이런 식으로 재판이 늦어지고 보니 허탈하기만 하다. 현재 전 씨 가족은 당장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정부와 건물주를 상대로 현재까지 밀린 병원비 4500여만 원과 2001년 9월 4일부터 1년간 매달 말일 200만 원씩을 치료비로 지급할 것을 요청하는 가처분 소송을 진행중이다. 이것이 병원비를 마련할 유일한 길인 가족들은 병원에도 재판이 끝나기만 기다려 달라고 여러 번 양해를 구해놓은 상황이다.

판사도 더 이상 재판이 늦어지지 않도록 다음 재판에서는 심문을 종결한다고 재차 확인해 두었지만, 하루하루 가는 것이 괴롭기만 한 전 씨와 그의 가족들에게 소송 결과가 나오기까지 또 한달 이상 더 기다려야 된다는 건 기다림이라기 보다는 피말리는 형벌에 가깝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나로서는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 아침에 병원 원무과에서 병원비 독촉을 받은 부인 이 씨로부터 걱정스런 전화까지 받은 터였다. 병원에서 오늘이라도 퇴원해도 된다며 밀린 병원비는 의료보험 처리를 하면 1천만 원 정도면 되니까 빨리 내고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검사 결과를 알려야 하는 의사의 심정이 그럴까. 재판 결과만을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결과를 알리지 않을 수도 없고, 일단 전화로 간단히 전한 뒤 자세한 건 직접 병원을 방문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했다. 그러나, 부인 이 씨는 얘기를 전해 듣고도 쉽게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병원에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재차 확인한 뒤 그제서야 포기하는 심정으로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아내의 눈물

"나도 빨리 돈 내고 퇴원하고 싶지, 왜 안나가고 싶겠어. 그런데, 돈이 있어야 말이지. 지금 15만 원씩 내야 하는 집 월세도 4개월이나 밀려 있는 상황인데다 여기저기 꾼 돈도 많고... 상황이 이러니까 아는 사람들도 혹시 돈 빌려달라고 할까 싶어 슬슬 피하는데 어디서 돈을 구하느냐 말이야..."

어디 그뿐인가. 사고 후유증으로 왼쪽 귀 청각을 모두 잃고 오른쪽 귀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전 씨가 답답함에 보청기라도 빨리 끼워 달라고 보채고 있지만, 임시로 사용할 수 있는 것만 해도 150만 원이라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다. 그런데, 1천만 원이라니.... 그야말로 답답한 소리다.

한참을 감정에 겨워 얘기하던 부인 이 씨가 좀 조용한가 싶더니 볼을 타고 눈물 같은 것이 보인다.

"어머님 우세요?"
"내가 그동안 안 울려고, 강하게 보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끝내 부인 이 씨는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내가 그를 만나고서는 처음 보는 눈물이다. 재판 결과도 결과지만, 건물주 정모 씨가 변호사까지 선임했다는 얘기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기는 건강하겠다, 돈 몇 천 물어주면 끝이지만 이 사람은 뭐냐 말이야. 산송장으로 평생 살아야 하는데. 이게 어디 사람이야? 그런데, 조금이라도 돈 덜 내려고 변호사를 선임한 거 아니야... 자기 돈 나가는 거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하지만 이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돈은 벌면 되고. 그리고, 내가 무리해서 한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한 거라면 또 몰라. 치료비나 달라는 건데, 변호사까지 선임할 돈이 있다면 차라리 그 돈 주고 합의하자고 하겠다..."

그러더니 "재판 결과가 안 좋게만 돼 봐라. 내가 매일같이 그 사람 집에 전화해서 괴롭히고, 그 사람 집에 가서 자살이라도 할 꺼야" 라며 심한 소리까지 한다.

너무 과하다 싶어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이 씨가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이 병원에 와서 환자 상태를 한번이라도 봤다면 이렇게까지 괘씸하진 않을 거야. 키우던 개새끼도 아프면 안고 바로 달려가는데, 자기 집 짓다 사고났는데 그럴 수가 있어? 나도 당한 만큼 괴롭히고 싶은 마음 뿐이야.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나도 자꾸 나쁜 마음을 먹게 되더라니까."

알고 보니 건물주인 정 씨는 사고 이후 딱 한번 병원을 방문해 위로금을 전달하려다 가족들이 거절하자 '법대로 하자'며 을러대고는 당시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환자라도 보고 가라는 얘기에 그런 건 뭐하러 보냐며 결국 환자도 한번 보지 않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지금 그와 전 씨는 법정에서 법의 공정한 판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나도 소송이나 할까봐. 내 인생은 이게 뭐냐고."
부인 이 씨는 말 끝에 푸념처럼 내뱉었다. 하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라지만 듣는 나는 그냥 넘겨지지 않는다. 더 못보겠는 건 말하는 내내 분과 설움에 겨워 계속 눈물을 흘리는 부인을 보고 따라 우는 전 씨의 모습을 볼 때다. 비록 귀는 안 들린다지만 눈치로 상황 파악쯤은 할 줄 알았다. 전 씨 역시 오늘 재판이 있다는 걸 알고 계속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내는데, 무언가 잘 풀리지 않았구나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점차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분노로 얼룩져 가고

병실을 나와 병원 로비에서 큰 아들 민수를 따로 만났다. 재판 서류를 전하고, 재판 결과에 대해 설명하는 내내, 그리고 설명이 끝난 뒤에도 민수는 한참동안 얼굴이 굳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어렵게 한마디 내뱉었다.

"제가 원래 사람을 잘 믿는 편이거든요...... 우리가 가만히 있으니까 더 막 나오는가 봐요."
그 말엔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모두 담겨있는 듯 했다. 선해만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못내 안타까왔다.

집에 가는 나를 병원 앞까지 따라 나오는 그에게 "그래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아예 버리진 말아요. 세상에 나쁜 사람도 있지만 저같이 좋은 사람도 있잖아요?" 하고 농담섞어 말했지만 세상에 대한 변명같기만 하고, 가식적인 말 같아 그런 말을 꺼낸 것이 괜시리 후회가 된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꼭 그격이다. 정작 책임을 져야 하는 미군측은 한국정부를 방패막이로 내세워 뒷짐지고 구경만 하고 있고, 미군당국을 대신해 억지 변명만 늘어놓기에 급급한 한국정부나, 기본적인 인간적 양심도 버리고 나는 건물주일뿐 공사는 하도급자가 알아서 했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건물주나, 모두 한심스럽고 화가 나긴 마찬가지다.

피해자가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었다면?
피해자가 전동록 씨가 아닌 건물주 본인이나 그의 가족들이었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무조건 책임이 없다고만 했을까.

세상은 적당히 나쁜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편하다지만 착한 사람들이 꼭 피해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희망마저 버리고 싶진 않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겪으며 점차 모질어가는 전씨 가족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정말 괴로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 병원비가 없어 퇴원도 못하고 있던 전동록씨가 도저히 병원에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워 급한 대로 카드 빚을 내어 11월 6일(화) 퇴원하였습니다. 일단 퇴원은 했다지만 모두 빚이라 생활이 막막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바랍니다."

농협 215088-52-114856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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