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기사는 기자가 지난 7월 16일 미군부대 고압선에 감전돼 사지를 절단한 전동록 씨와 그의 가족들을 지켜보며 쓴 글입니다. - 편집자 주)

한강변을 따라 달리는데 차창 밖 작은 섬 위로 갈대숲이 펼쳐졌다. 일이 바쁘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던지라 차창 밖에 펼쳐지는 가을 풍경이 온통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한여름 사고를 당하고 3개월 넘게 병원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부인 이 씨야 말할 것도 없다.

"어머, 저거 갈대 아냐? 갈대 숲에서 데이트해 본 적 있어요?"

지금까지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순간 당황해 하며 다시 질문을 부인께로 돌렸다.

"아니요, 어머님은요?"
"갈대밭에서는 못해봤고, 논밭에서야 있지."
"아버님이랑요?"
"전주에 가면 덕진공원이라고 있거든...."
"그럼 두 분은 연애결혼하셨나봐요?"

관련기사
1. "고압선 이전 요구 묵살하더니..."
2. 양쪽 팔다리 잘리고 신용불량자로
3.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전주는 전동록 씨의 고향이다. 이씨는 전동록 씨와의 데이트 시절이 생각나는지 수줍은 듯 웃었다. 누구에게나 연애시절은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나, 앞으로 함께 어딘가를 두 발로 거닌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시절의 기억이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아련한 슬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보이는 모든 것은 아픔이 되고

▲ 전동록씨가 즐겨 타던 오토바이. 지금은 주인을 잃고 마당에 덩그러니 혼자 서있다.
10월 24일. 병원에서 파주 전동록 씨 집으로 내려가는 세시간여. 그때만큼은 나도 그렇고, 부인 이 씨도 간만에 여유라는 걸 맛볼 수 있었다.

특히 부인 이 씨에게는 정말 오랜만의 바깥 나들이였다. 사고 후 집에 내려가기는 이번이 세 번째다. 그나마 최근 두 번은 모두 방송국의 취재를 겸해서였다. 방송사에서 병원에서 집까지, 다시 병원까지 알아서 데려다주니까 그렇지, 24시간 남편 옆에서 간호를 해야 하는 그로서는 파주에 있는 집까지 다녀온다는 건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이번엔 집에 가는 김에 한밤 자고, 집안 정리도 좀 해야겠다며 병원에 쌓여 있던 늦은 여름 빨래까지 잔뜩 짊어지고 나서는 참이었다. 나는 피곤하실 것 같아 잠을 청했지만 차 안에서는 원체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바람에 차라리 드라이브를 한다 생각하고 이때만이라도 병원에서의 묵은 때를 씻어낼 수 있길 바랬다. 하지만 보이는 모든 것은 그가 겪고 있는 현실과 투영되어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여유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자 사고 당시가 생각나는지 "앰뷸런스 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떨려"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나가는 오토바이도 그에겐 괴로운 기억이다.

"오토바이만 보면 그이가 타던 오토바이가 생각나. 그이가 오토바이를 얼마나 아꼈던지 몰라. 자기 세수는 안해도 오토바이는 반짝반짝하게 깨끗이 닦았다니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오토바이건만, 지금은 주인을 잃고 집 앞 마당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서 있다. 다시는 오토바이를 탈 수 없으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가족들에게 오토바이는 건강할 때 전 씨의 두 팔, 다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 마음만 더욱 괴로울 뿐이었다.

마침 차창 밖으로 한 무리의 새들이 가을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도 바꿀 겸 그곳을 손짓하며 불렀다.

"어머님, 저것 좀 보세요! 정말 멋지지 않아요?"
"나도 진짜 (저 새들처럼) 자유롭게 날아봤으면 좋겠어..."

이 씨의 대답에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다. 분위기나 바꿔보려던 나의 계획이 실패했음은 물론이다. 요새 홧병이 나서 밤이면 속에서 불이 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속옷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적도 많다는 그였다. 겉으론 많이 여유로워 보이고, 강해 보이는 그였지만 속은 아니었던가보다. 그 동안 혼자 속으로만 삭혔어야 했을 슬픔과 좌절, 고통의 무게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차는 사고 현장 부근에까지 와서 취재진과 합류한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큰아들 민수와의 첫 만남

집에는 뜻밖의 사람이 와 있었다. 그 동안 개인 사정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큰아들 민수(25)가 전날 밤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민수와의 첫 만남이 시작됐다.

난 늘 민수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님은 말끝마다 민수 얘기를 할 때가 많았다. 특히, 어떤 결정이라도 할라치면, 그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엔 사소해 보여도 늘 "민수와 상의해 봐야 하는데... 이젠 애들이 다 커서 내 마음대로 못하겠더라구"라고 하시며 미루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만큼 어머님께 민수는 남편 다음으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남편 전 씨가 사고를 당한 이후에는 더욱.

짧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민수가 현관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취재진을 피해 밖으로 자리를 피한 것이다. 나 역시 취재 중엔 특별히 할 일이 없던 터라 대문을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민수가 집 옆 논둑에서 긴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한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채 어딘가를 멀리 응시하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왔다. 순전한 나의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겠지만, 비록 말은 없어도 그의 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나는 듯했다.

거기에 한껏 주눅이 든 나는 감히 다가가서 말을 걸 생각은 못하고 괜히 마을 주변만 어슬렁거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마당에서 다시 민수를 만났을 때, 이러다 말 한마디 못하겠다 싶어 용기를 내 말을 붙였다.

"갑작스럽게 취재진들이 방문해서 놀랐죠?"
"아니요... 취재한다는 건 알았어요. 오늘 집에 온다는 건 몰랐지만..."

▲ 전동록 씨의 큰아들 민수 씨의 군복무시절 가족사진. 군복입은 사람이 민수 씨.
의외로 민수는 내 질문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선선히 응해주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나는 그때부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 동안 민수를 만나면 묻고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민수가 찍었다는 사진들에 대해서다.

전씨가 절단술을 받기 전 화상의 흔적이 완연한 손과 발을 찍은 사진은 모두 민수가 찍은 것들이다. 내가 첫 번째로 올린 기사에 실린 까맣게 타들어간 손과 발 사진도 실은 민수가 찍은 사진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너무 끔찍해서 그대로 싣지 못하고 그래픽 처리를 해야 했던 것들이다.

나는 부인 이 씨로부터 사진을 건네받고, 처음 얼마간은 아예 쳐다보질 못했다. 그러다 큰 맘 먹고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본 뒤에도 그 사진들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괴로웠다.

그러면서 그런 사진을 누가 찍었을까 궁금해졌다. 보통 사고를 당하면 사진찍는 것 등은 경황이 없어서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사진까지 찍을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지, 민수라는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해서 찍어둔 거예요.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가급적이면 사진이라도 많이 남겨둘 요량으로요. 그리고, 미군들도 병원에 한 번 왔다 갔지만 환자는 보지도 않고 갔기 때문에 아버지 상태가 어떤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소송에 필요한 자료로도 쓰구요. 아버님 치료받을 때 어머님은 못들어 오게 하고 제가 혼자 찍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엔 더 심했어요. 저도 보고서는 구역질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새삼 그의 사려깊음에 놀랐다. 왜 어머님이 그를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믿고 계시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죠. 정말 죽는 줄만 알았거든요."

그 역시 어머님과 똑같은 말을 했다. 살았으니 다행이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뱉는 것이 되레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딴에는 맏아들로서 느낄 부담감이 적지 않을텐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런 얘기가 나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 날 그가 뒤늦게 내가 쓴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고 리플을 달아놓은 것이 보였다.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고 몇 분이 작게나마 성금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해 하는 글이었다.

"이제는 편안히 쉬시고 제가 좀더 효도하라는 뜻이라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과연 나라도 저렇게 얘기할 수 있었을까.

파주에서의 첫 만남 이후 다시 민수를 보게 된 것은 25일 변호사 사무실에서였다. 사무실을 나와서 이날 오랜 공백 끝에 아버지와 처음으로 재회했을 그에게 첫 만남의 순간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막 때리시던데요..." 아버지 수술한 거 처음 보았을 텐데 어땠냐는 물음에는 "뭐, 말이 안나오죠..."하곤 더 이상 말이 없다. 사실,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약소국민의 슬픔

그와 못다한 얘기는 부족하나마 10월 27일, 고려대에서 열린 '고 윤금이씨 9주기 추모 2001 미군범죄희생자 추모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날 나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미군 피해 사례 증언자로서 무대에 나섰다. 약간은 긴장된, 그러나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전에도 미군부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많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아버님 사고 이후 미군 범죄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군부대가 적절한 보상을 않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힘이 약해서입니다. 힘이 강하다면 함부로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무대에서도 그랬지만, 내가 기사 초안 검토를 요청했을 때에도 이 마지막 말을 강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라가 힘이 약해 다시는 아버지와 같은 희생자가 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힘없는 나라의 국민은 슬프다.

덧붙이는 글 | * 후원계좌 농협 215088-52-114856 이명화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