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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 보고 싶었어?"
"아-니?"
여동생이 눈을 가볍게 흘기며 오빠의 볼을 살짝 친다.

지난 토요일(20일) 오랜만에 아주 반가운 손님이 왔다. 멀리 전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찾아온 것이다.

팔, 다리를 잘라낸 뒤 직접 와서 보기는 처음이라는 여동생 전순자 (45) 씨는 오빠의 수술한 부위를 만지작거리며 휴지로 연신 눈시울을 찍어댔다. 얘길 들어 이미 어느 정도 상상은 했다지만 직접 보니 또 다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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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씨도 오랜만에 여동생을 보니 한결 마음이 풀어지는지 "알아? 지난번에 수술한 거 잘못 돼서 여기서 또 잘라냈어"하며 이곳 저곳 아프다고도 하고, 눈물도 글썽인다.

두 사람 다 이미 중년을 넘은 나이지만 그때만큼은 천상 어린 남매 같았다. 이제 왼쪽 귀는 청력을 모두 잃고 오른쪽 귀만 간신히 들을 수 있어 한쪽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모양이 무슨 귓속말이라도 하는 양 정겨워 보였다.

유독 두 사람 사이가 각별해 보이길래 물어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전 씨의 아버지는 여동생 순자 씨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그 때 전 씨의 나이가 10살. 졸지에 가장이 된 어머니가 집 근처 전매청에 돈벌러 나가면 막내 순자 씨를 돌보는 건 남은 형제들의 몫이었다. 전 씨도 점심때가 되면 종종 어린 동생을 등에 들쳐업고 젖을 먹이러 어머니께 달려갔다.

그런 순자 씨에게 큰 오빠가 아빠처럼 엄한 존재였다면 둘째 오빠인 전 씨는 친구같은 존재였다. 결혼도 같은 날, 시간만 달리해서 치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참으로 황망했을 것이다.

"오빠랑은 말도 못하게 친했죠... 어려서부터 그렇게 고생만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파서..."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내내 눈물바람이던 여동생과는 달리 올케 되는 전 씨 부인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오랜만에 여동생을 만나 눈물을 글썽이는 남편에게 "어이구, 이제 애기가 다 됐네?"하며 농도 던진다. "씩씩하게 살아야 해, 울긴 왜 울어?" 이미 눈물을 쏟을 만큼 다 쏟은 그였다.

"처음 한 달간은 계속 울기만 했지. 그런데 울어서 해결이 안되더라고. 이제는 눈물도 말랐는지 안나와."

석달 넘게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부인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지혜다. 처음엔 다들 가망이 없다 하고, 임종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까지 들었지만 이렇게 살고 보니 부인도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는 듯했다. 무엇보다 전 씨 본인이 생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싸워온 결과다. 하기야, 사우디에도 다녀오고 베트남전에 가서도 살아 돌아왔다는 그였다.

"한번은 울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 함께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람 하나가 내가 만일 전쟁 중에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하더래. 그런데 막상 전투 중에 폭탄이 터져 한 쪽 팔과 두 다리를 잃게 되자 그때는 이렇게라도 살아서 다행이라며 감사해 하더라는 거지. 그러면서 죽음 앞에선 이렇게 약해지는가 보다며 솔직히 이렇게라도 살게 된 것이 고맙지만, 자신 때문에 고생할 식구들을 생각하면 죽고 싶은 심정이라며 울더라구."

이어서 이런 얘기도 했다.

"9월 말인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다 처음으로 쌀로 만든 미음이 나왔을 때였어. 한숟갈을 뜨던 남편이 먹다 말고 왈칵 눈물을 쏟는 거야. 내가 이렇게 살아서 이런 것도 먹는구나 싶으니 눈물이 치솟던 거지. 나도 덩달아 마음이 약해져 빈속에 처음 먹는 거라 조금만 먹였어야 하는데, 달라는 대로 다 주다보니 죽 한그릇을 다 비웠더라구. 그런데 결국 탈이 나서 일주일간 금식을 했잖아."

정말 웃지 못할 얘기다.

"어떤 사람들은 저러고 살아서 뭐하냐,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 보면 내가 막 뭐라고 해.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이가 아내가 없냐, 자식들이 없냐, 난 절대 저 사람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솔직히 나 역시 전 씨를 보며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는가 보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그것을 잃어버릴 때 느낀다고,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본 사람만이 생명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에게 먹는다는 것은

다음 주 월요일(22일), 병원을 다시 방문했을 때 전 씨 부인은 남편과 먹는 걸로 한참 씨름중이었다. 합병증으로 일시적으로 찾아온 신부전증이 만성화되어 적어도 매주 한번은 혈액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검사 전 금식을 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검사 때문이라지만 물 한모금 못먹게 하니 잔뜩 화가 난 것이다. 검사가 끝나고도 먹는 걸 거부하며 '단식투쟁'(?)에 나섰다.

물론, 투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중에 마음이 풀린 전 씨는 빵도 달라 해서 먹고, TV 드라마에서 술마시는 화면을 보고는 붕대 감긴 팔로 아들과 잔 부딪히는 시늉을 했다. 워낙 술을 좋아해 사고 전엔 부부가 치킨집에서 장사는 뒤로 하고 함께 술마시는 날도 많았다는데, 이젠 아쉬운 대로 술마시는 시늉이라도 하며 적적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다.

아마 이 날 전 씨가 한참동안 마음을 풀지 못한 건 물 한모금 자신의 의지로, 자기 손으로 마실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과 더불어 '먹는 것'이 갖는 그만의 특별한 의미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그에게 '먹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특별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 앞으로 기회만 된다면 전동록 씨 병상일기를 계속 연재할 생각입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후원 바랍니다. 
* 후원계좌 농협 215088-52-114856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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