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友 선생님께

선생님, 그동안 몸 건강히 잘 지내셨는지요?
성큼성큼 다가서는 봄기운의 저돌적인 울림으로 이미 개나리며 진달래며 봄꽃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 향기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똘망똘망 아이들에 둘러싸여 교실에서 또 어떤 희망을 꽃피우고 계신지요? 아직도 창너머 봄아지랑이를 발견하듯 희망과 꿈을 찾아내고 만들어 가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기억에 생생한데 훌쩍 커버려 선생님 앞에 서기도 부끄러운 지금,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제가 지금 뿌리박고 서있는 이 곳 대학에서 후배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6일에는 숭실대에 다니는 한 장애 여성이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학교 당국이 마땅히 해야 할 편의시설 등을 제대로 하지않아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피해를 입었다면서 서울 지방법원에 오천만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던 것이지요.

소송을 낸 박지주 씨는 지난 숭실대 사회사업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휠체어 1급 장애인인데 편의시설 미비와 장애 학생에 대한 학교의 냉대와 무관심을 견디다 못해 휴학을 하고 홀로 소송을 준비해오다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김칠준 변호사를 만나면서 소송을 결심했지요.

요즘엔 그 일을 도우느라 정신이 없답니다. 그리고 지난 3월부터는 '인권교육을 고민하는 교사모임'에 월요일마다 나가 '장애우 인권수업지도안 작성을 돕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는 '애자'라는 말이 놀림말이나 왕따말로 유행인거 말이지요. 애자란 말이 장애자의 줄임말이란 것을 저도 최근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병신이나, 등신이란 말이 보다 폭넓은 의미로 - 장애인을 지칭하지는 않았는데- 쓰였는데 '애자'란 단어는 보다 노골적으로 장애인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더디긴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나아지고 있다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아이들이 어른들의 가장 솔직한 거울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좀 지난 일이던가요? 한 어머니가 장신지체 장애 아동을 목졸라 숨지게 한 것? 그리고 최근에는 대학강사인 어머니가 지능이 떨어진다고 자기 자식을 역시 목졸라 숨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엊그제, 40대 정신지체 장애인을 장애인 단체에 청부살인까지 한 가족에 대한 뉴스를 저는 들어야만 했습니다.

부모가 장애인 자식을 죽이게 하고 그것도 부족해 청부살인까지 하는 것이 장애인에 대한 장애인의 날 비춰지는 온갖 아름답고 사랑스런 장애인들의 뒷모습에 감추어진 진정한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그 은폐된 사회의 기만적인 모습을 '애자'라는 단어를 통해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잇는 것은 아닐까요, 선생님? 혹시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거짓말 마세요. 장애인을 죽이고 있으시면서'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글쎄요. 제가 이런 것만 말하면 선생님께서는 너무 어두운 것만 들춰내는 것 같다 라고 말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애 아동의 교육 수혜율이 3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장애인의 실업률은 80%에 육박하며 전체 장애인중 한달에 두 세번도 외출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태반인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올해도 어김없이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한달 내내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해 말하겠지요. 그리고 각종 행사장에 장애인을 부르고 함께하겠지요. 그리고 많은 장애인 역시 그 날이 자신들의 날이라 믿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께서 제게 들려주신 4월 20일 장애인 날의 유래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신군부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여론을 의식하고 국내의 장애인들의 높은 불만을 무마하고 장애인들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권이 급조한 것이니 너희들은 거기에 절대 놀아나지 마라시던 선생님의 말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만들어준 장애인 날에는 국가가 얼마나 장애인을 차별하고 외면해 왔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죽어 갔는지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똑똑히 알려 주기 위해 검은 조기를 내달자고 주장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조기를 달아야 하겠습니다. 장애인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약속한 대표적 장애인 시설 비리로 알려진 에바다 사건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비리 재단의 복귀와 전횡이 계속되고 있답니다. 6년째 아이들과 함께 싸워온 에바다 학교 선생님들, 언제까지 외로이 그렇게 버틸 수 있을까요?

TV에서 라디오에서 장애인에 대한 사랑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것은 혹시나 이런 장애인들의 적나라한 현실을 감추기 위한 우리 사회의 절묘한 속임수는 아닌지... 선생님, 저는 아직도 많이 어린가 봅니다. 여전히 저 혼자서는 이런 문제의 올바른 답을 찾아내기란 역시 무리인가 봅니다.

얼마전까지는 일반 학교에 단 한명의 장애 학생을 위해 편의시설을 했다고 난리들이었습니다. 청와대에까지 초대되더군요. 정말 기분 씁쓸했습니다. 과연 교육기관이 마땅히 해야할 필수 시설을 했다고 저렇게까지 칭찬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학생이 학교에 있어 여학생 관련 시설을 만드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늘 강조하셨습니다. 차이와 차별의 가장 큰 차이는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고 책임과 이해 그리고 의무를 말하고 실천하는 것이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는 진정한 방법이라고.

그 곳 교장 선생님께서는 분명 책임으로서 그렇게 하셨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혹시나 책임이 빠진 사랑이나 연민 또는 동정이 아닌지 장애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일반학교에서 특수학급을 맡고 있는 특수교사인 제 친구는 요즘 학교사회와 동료 선생님에게 정말 큰 실망을 하고 심각한 회의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특수학급을 맡고 있는 자신을 칭찬하며 장애인을 사랑하자던 나이 많은 교사 한분이 이번 통합 교육을 꿈꾸며 이 학교에 진학한 자폐증 아동에 대해 담임맡기를 거부해 버렸던 것입니다.

통합 교육을 하려면 일반 학급에서 비장애 아동과 함께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인데도 말이지요. 친구는 그 아이 문제보다 믿었던 선배교사의 이중적인 모습에 더 큰 상처를 입었던 것이지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선 일반 공립학교에서 8번이나 뇌성마비라고 입학 거부한 저를 어서 우리 학교로, 자신이 담임을 하겠다고 우울해 있던 저를 격려해 주셨지요.

선생님께서는 제 어머니와 그러셨던 것처럼 특수학급의 특수교사와 머리를 맞대시고 연신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하다며 온갖 간식거리로 젊은 특수교사에게 과외를 받으시리라는 거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합니다. 아마 아이들과 함께 또 하나 멋진 희망을 만들어 주시겠지요.

선생님의 믿음처럼 저 역시 믿고 있습니다. 단 한명 아이의 희망이라도 만들어지고 있는 한 결코 '우리 교육'을 포기할 수 없음을.

선생님 봄철 큰 일교차에 건강 조심하시고 가까운 시일내에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서울에서 제자 형수 올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eduable.jinbo.net) 사무국장을 맡아 장애인들의 고등교육기회확대와 무장애배움터 실현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