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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법문화하다

.. 혼란해 있던 사상의 정리를 ‘아테네 헌장’은 法文化했다고 할 수 있다 ..  <미셸 라공/주종원-현대의 폐허=도시>(삼성미술문화재단,1982) 139쪽

‘혼란(混亂)해 있던’은 ‘뒤죽박죽이던’이나 ‘어수선했던’이나 ‘어지럽던’으로 다듬습니다. “사상(思想)의 정리(整理)를 …했다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으로 갈무리했다고 할 수 있다”로 다듬어 봅니다. 한자말 ‘사상’과 ‘정리’를 그대로 두고 싶다면, “사상을 …으로 정리했다고 할 수 있다”로 다듬어 줍니다. 토씨 ‘-의’를 끼워넣은 대목도 얄궂지만, 어설픈 번역 말투가 그지없이 얄궂습니다.

 ┌ 법문화(法文化) : 법문으로 만듦
 │
 ├ 法文化했다고
 │→ 법으로 못박았다고
 │→ 법으로 세워 놓았다고
 │→ 법으로 갈무리했다고
 └ …

법문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법문화’라는데, 한자를 하나하나 풀면서 살피면, “법으로(法) 적어(文) 놓았다(化)”가 ‘법문화’라는 소리입니다.

 ┌ 어지럽던 생각을 아테네 헌장이 갈무리했다고
 ├ 뒤죽박죽이던 생각을 아테네 헌장으로 갈무리했다고
 ├ 갈팡질팡이던 생각을 아테네 헌장에 따라 갈무리했다고
 └ …

보기글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법문화’라는 낱말이 어떻게 지어졌으며 어떻게 쓰였고 어떻게 풀어내면 좋은가를 따져 보아도, 글월은 어수선합니다. 어딘가 두루뭉술합니다. 뭔가 어수룩합니다. 낱말과 낱말을 1:1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번역이 아닙니다. 나라밖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가를 돌아보면서, 나라안 사람한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가를 알아듣기 좋도록 풀어내는 일이 번역입니다.

미국사람이 쓰는 말투나 말짜임을 고스란히 한국 말투나 말짜임으로 담아서 적어 놓으면 번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말과 일본말은 말짜임이 비슷하다고 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같지 않기 때문에, 일본말을 한국말로 옮길 때에는 ‘비슷해 보이는 말투’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이 비슷하게 쓰는 한자말이 있다고 해서, 한자말 소리값만 따서 옮겨적는 일이 번역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널리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어내어야 비로소 번역입니다.

 ┌ 법문화하다 (x)
 │
 ├ 법으로 세우다 (o)
 ├ 법으로 만들다 (o)
 ├ 법으로 못박다 (o)
 ├ 법으로 삼다 (o)
 └ …

가만히 보면, 오늘날 우리 나라 국어학자들은 ‘한문학자’이지, 제대로 된 ‘우리 말 학자’는 못 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말과 글을 옳게 살피고 다루는 학자로 우뚝 서지 못한 채, 우리 말과 글에서 고유한 맛과 멋을 살리는 데에 마음을 못 쏟는 분들이 아니랴 싶습니다.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어느 누구나 손쉽게 배워서 두루 쓸 수 있도록 이끄는 말틀과 말투를 가다듬는 학자가 못 되고, 옛 한문 투를 국어사전에 싣는 데에만 바쁜 분들이 아니랴 싶습니다.

생각과 마음을 알뜰히 담는 말이어야 하고, 생각과 마음을 북돋우는 글이어야 하며, 생각과 마음이 야무지고 튼튼하게 서도록 이끌어 가는 말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이든 마음이든, 얼이든 넋이든, 우리 나름대로 우리 땅에서 우리 이웃과 오붓하게 어울리면서 꽃피워 나가는 문화로 말과 글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어서, 자꾸만 얄궂은 말투가 번지고 안타까운 고름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ㄴ. 상품화하다

..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산업 사회에서 어떤 신체적 조건이 이상화될 때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형을 달성하도록 요구받는다 ..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삼인,2002) 265쪽

“신체적(身體的) 조건(條件)이”는 “신체 조건이”로 다듬거나, ‘몸이’나 ‘몸 생김이’로 다듬어 줍니다. ‘이상화(理想化)될’은 “좋은 것처럼 받아들여질”이나 “좋다고 여길”로 손질합니다.

 ┌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사회
 │
 │→ 모든 것을 상품으로 삼는 사회
 │→ 모든 것을 상품으로 여기는 사회
 │→ 모든 것을 상품으로 다루는 사회
 │→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사회
 └ …

상품으로 삼거나 다룬다면 “상품으로 삼는다”고 하거나 “상품처럼 다룬다”고 써 주면 됩니다. 어느 것이나 상품으로 사고팔기만 한다면 “상품으로 사고판다”고 써 줍니다. 사람들 목숨도 상품이 되고, 사람이 죽는 일까지 상품으로만 여긴다면, “상품이 된다”고 하거나 “상품으로 여긴다”고 적어 줍니다.

반가운 모습이든 얄궂은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 적어야 알맞습니다. 느끼는 그대로 적고, 보이는 그대로 적어야 알맞춤합니다. 괜히 껍데기를 씌우거나 겉치레로 꾸미면, 말이고 글이고 제자리를 잃고 제 갈 길을 놓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태그:#-화, #우리말, #우리 말, #화化, #외마디 한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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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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