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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시장이 열렸던 남탑 거리에는 오늘도 조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 남탑 거리. 포로 시장이 열렸던 남탑 거리에는 오늘도 조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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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바닥은 소란스럽다. 목소리를 높여 호객하는 사람, 멱살을 쥐고 싸우는 사람, 잃어버린 물건을 여기에서 찾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 그렇게 왁자지껄한 곳이 시장이다. 모자의 애끓는 상봉도 흔히 있을 수 있는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다. 더구나 조선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청나라 사람들은 더욱 그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흥정이 시작되었다.

"조선인이라 비싼겨?"

"가지고 있으면 돈 된다 해. 백 냥, 이백 냥 들고 찾으러 온다. 출신이 좋으면 횡재할 수도 있다. 어제도 삼백 냥에 찾아간 사람이 있었다 해."

조선인 포로는 투기의 대상이었다

조선인은 포로시장에서 인기가 있었다. 남자 포로는 덩치가 좋아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매수자에게는 딱 이었고 여자 포로는 인물이 좋아 호색한들이 군침을 흘렸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은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거금을 들고 찾아오는 사대부집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마 해?"
아예 물건 취급이다.

"때깔 한 번 좋다 해. 손님도 물건 고르는 눈이 높으셔."

흥정의 대상에 오른 포로는 댕기머리 처자다. 뉘 집 딸인지 이목구비가 수려하다. 세파의 더께도 없고 구김살이 없다. 처자는 청나라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오가는 눈빛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장사꾼은 너스레를 떨며 사려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매수자의 태도에 따라 값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물건은 실컷 쓰고 되팔아도 남는 장사다 해."

처자는 어젯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악몽이라 하기에도 몸서리쳐졌다. 혀라도 깨물어 죽지 않고 시장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누런 이를 드러내고 히죽거리며 지껄이고 있는 배불뚝이 포로 주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그래도 살아있는 목숨이라고 양지를 찾아 햇볕을 쬐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저주스러웠다.

백탑보에는 오늘날에도 상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 백탑보. 백탑보에는 오늘날에도 상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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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밖 백탑보에 사는 배불뚝이는 장사꾼이다. 처자를 사들일 때 데리고 있으려고 매입한 것이 아니다. 임자만 잘 만나면 많은 매매차익이 있을 것 같아 거금을 베팅한 것이다. 이렇게 구매한 포로를 시장에 내놓으려니 금방 팔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뭔가 아쉬웠다. 흑심이 생긴 것이다. 배불뚝이는 자신의 침소로 처자를 불러들였다.

포로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주인의 명을 거절하면 폭력이 뒤따른다. 처자는 순순히 응했다. 열일곱 살 어린 처자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처음 당할 때는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돌아온 것은 매질이었다. 완강한 저항은 더 강력한 폭력을 부른다는 것을 체험한 처자는 항거를 포기했다. 몸과 마음이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욕심을 채우고 처자의 몸에서 떨어지던 배불뚝이가 내뱉었다.

"야, 넌 네 에미만도 못하냐?"

그자의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멎었다.

"아니, 저자가 엄마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배불뚝이의 손길이 스친 가슴에 벌레가 스멀거리는 것 같았다. 온 몸이 가려웠다. 처자는 어깨를 감싸며 그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게슴츠레한 눈에 나른한 포만감이 걸려있다. 눈이 마주쳤다. 독사 눈 같다. 그자의 눈에 독침을 뱉어 눈을 멀게 해주고 싶었다. 독기를 뿜어 그자를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허나, 처자에게는 그러할 능력도 독침도 없었다.

처자는 어젯밤의 일을 이야기 하지 못했다.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뭔가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배불뚝이에게 "저자는 인간이 아니야. 짐승이야. 짐승"이라고 저주를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자신도 짐승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짐승 같은 저자의 폭력에 짐승이 되었을 뿐이야. 네 자의가 아니었어." 악이라도 써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햇살이 따사로운 4월의 오후. 햇볕을 찾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금 이 시간, 짐승 같은 그자의 손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것이 원망스러웠고 그자의 배설물이 자신의 아랫도리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 역겨웠다.

남탑은 심양시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 남탑 표지석. 남탑은 심양시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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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얼마냐 말이오?"

조선인 처자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사람이 마음이 급해졌다. 공포에 떨고 있는 처자의 검은 눈동자가 역설적이게도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저고리 섶을 치밀고 올라와 있는 젖무덤이 눈을 현혹했다. 치마 사이로 슬쩍 보이는 피부로 보아 속살이 희고 고울 것 같았다. 이 모습을 간파한 배불뚝이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백 삼십 냥 받아야 하는데 꼭 사시려면 백 이십 냥만 내시라."

노련한 장사꾼이다. 매수자의 태도로 보아 백 냥은 너끈히 받을 수 있다고 간파한 배불뚝이는 20냥을 얹어서 부른 것이다. 포로는 정찰이 없다. 부르는 게 값이고 거래되는 것이 가격이다.

"백열 냥만 하자 해."

몸이 후끈 단 매수자가 엽전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열 냥은 거저다. 뿐만 아니라 80냥에 산 포로를 하룻밤 사이에 재미도 보고 30냥을 벌게 되었으니 배불뚝이 입이 째졌다. 로또가 따로 없다. 대박이다. 당시 청나라의 물가는 소 1마리 값이 15냥이었다. 그렇지만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매수자가 사가는 입장에서 좋은 물건 싸게 샀다는 기분이 들어야 발걸음이 가볍다는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되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엽전 꾸러미를 슬며시 끌어당겨 자신의 돈궤에 넣고 포로의 손목에 감겨있던 새끼줄을 풀고 있었다. 처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까지 오고간 얘기가 자신을 두고 오고간 말이며 엽전 꾸러미가 자신의 댓가란 말인가?

“엄마!”

외마디 소리와 함께 옆자리에 앉아있는 여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여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손발이 떨리고 호흡이 멎는 것 같았다. 넋이 나간 여인은 본능적으로 딸아이를 끌어안았다. 이 때였다. 배불뚝이의 채찍이 날아들었다. 얼굴에 채찍을 맞은 여인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 사이 억샌 팔이 처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머니!"

끌려가는 처자가 울부짖었다. 피투성이 얼굴을 감싸 쥔 여인은 손가락 사이로 멀어져 가는 딸아이를 바라볼 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끌려가며 자꾸만 뒤돌아보던 처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현세자는 시장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었다.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서 다리 뻗고 한 번 울어 볼만한 땅 심양에서 조선의 왕세자는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며 통곡하고 싶었던 것이다.


태그:#소현세자, #포로, #남탑, #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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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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