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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 기존 주류 정치인과는 다른 이력을 가진 독특한 후보가 등장했다. 고졸에 인권변호사 등 온갖 역경을 뚫고 올라온 그는, 국민들로 하여금 각종 정치 비리와 IMF를 거치면서 생긴 정치인에 대한 환멸을 정화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와 관심을 등에 없고 16대 대통령이 된 노무현 대통령이다.

특검 실시와 한·미 FTA 체결 등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선적인 이미지와 잦은 말실수 같은 스스로의 처세 때문에 가뜩이나 희미했던 지원·기반 세력은 뿔뿔이 흩어지고, 마침내는 국민들의 비난-하다못해 초등학생들까지도 대통령에 대해 왈가왈부하게 되었다.

지금 벌써 4년 남짓한 노 대통령의 치세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현재의 평가를 받게 되기 이르는 데에는 그의 실책에 원인이 있었으며, 이 실책은 고대 로마의 지도자들이 하지 않았던, 혹은 경계시했던 그것이었다는 것이다.

로마를 지킨 조건

로마는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500여 년간 강력한 제정 하에 통치한 국가다. 그들의 역사를 답습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또한 불가능 하지만, 그러한 타이틀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 국가의 환경 등 고려할 사항이 많지만, 그 주역은 고삐를 쥔 황제-지도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고대 로마인들 중에서도 '진정한 실력자'만이 권위의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자는 제위에 오르더라도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학벌, 족·파벌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마를 이끈 황제의 조건은 훨씬 더 단순한 데 있었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왕들 보다 오히려 현 대통령의 모습은 '위태로웠던 왕들'의 모습에 더 가깝다.

첫째, 로마 황제의 필수 조건은 리더십이었다. 이는 뜨거운 열정과 의지에서 나온 강경한 것이든, 혜안에 의한 시의적절하고 건전한 판단을 통한 냉철한 것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권위와 위엄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

민의에 어긋난다면 달변으로 백성을 설득 시켰고, 때론 모든 비난을 뒤로하고 강행한 뒤 혁혁한 실적을 내기도 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서 약간의 노 대통령의 인상이 겹쳤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출신이나, 치적 등을 모두 대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강행하고야마는 지도자적 고집과 반면 성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국민들에게서 잊혀진 왕이 되어버리는 모습은, 노 대통령의 고집스런 정사나, 이것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언론의 뭇매를 맞고, 독선적인 대통령으로 이미지화 되어 가고 있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지원군의 결핍과 함께 출범했다. 독특한 그의 이력만큼, 정치에 잔뼈 굵은 든든한 지원자가 없었다. 국가의 요구에 비해 무작정 밀어붙이는 노대통령의 행동들은 오히려 지원군을 멀어지게 했고, 언론 통폐합과 특검 등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런 공격적인 정치행보는 적을 더 흥분시키게 할 뿐이었다.

정면돌파형 노 대통령에게 변호사적 냉철함은 있었지만, 정치인-대통령-다운 수완은 부족했던 듯싶다. 이런 면에서 그는 대한민국호의 키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두 번째는 적을 최소화 하는 것이었다. 이는 황제의 앞으로의 치세를 보장하는 열쇠가 되었을 것이다. 리더십의 문제와도 연결되지만, 이는 정치적 시각을 필요로 하는 문제로서 +α적 요소였던 것이다. 특히 패배자에 대한 관용은 잘하면 상대를 감복하게 하는 동시에 재임 기간 동안의 든든한 동반자가 생기는 것이었고, 못하면 재임기간을 단축하는 양날의 칼 같은 것이다.

이는 로마에선 황제가 아니어도 전쟁을 겪은 군사 수부들에겐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진영 병사들을 용서했고, 왕은 아니었지만 현명한 켈리아리스와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대항했던 율리우스 키빌리스 진영의 로마군을 용서했다. 그들의 행위는 결국 사령관이나 군단장 몇의 황제자리에 대한 야심에 우롱당한 결과일 뿐이라는 이유다.

노 대통령은 이 부분에서도 실수를 했다. 바로 후단협의 처단을 용인한 것이다. 관계에 있어 지나치게 확실함을 추구했던 것이 아닐까.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고, 시기·상황에 따라 판단이 상이해지는 것이 정치 현장인데, 과거의 동지들을 추궁하고, 공격하는 것은 없는 적까지 만든 셈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에게 공격의사를 밝힌 것이 먼저지만, 대통령은 대통령이지 않은가.

세 번째는 인사 문제다. 앞선 두 가지가 충족되더라도 실무에서 사람을 잘 다루어야 한다. 곁에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어야 하며,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물을 배치하는 것도 중요한 조건이다. 갈바 황제는 협력자 인선에 실패한 황제다. 동료 집정관으로 오토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오토 당사자, 군인, 원로원, 국민을 모두 등 돌리게 만들었고, 끝내는 1년도 채 안 되는 임기를 마감했다.

반면 위기 시의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와 무키아누스 콤비는 정말 대단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1년에 황제가 3번이나 바뀌는 요동치는 로마 정계를 정비하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데에는 무키아누스라는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로서 천거 받는 것을 거부하고, 당시 갈리아 인의 반란에 대해 적절한 군사 전략을 폈다. 이후 내전 종료 후엔 공정한 처신으로 베스파시아누스의 공백을 완벽하게 막아주고, 황제가 귀국한 후에는 모든 바통을 넘겨주고 떠난 인물이다.

노 대통령은 지나치게 '감(感)'에 의존한 코드인사 등으로 그 '감'이 어긋날 때마다 언론, 정치인, 국민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임기 내내 인력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초기 이러한 행동들의 누적에 의한 자체 인력 풀(pool)의 가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노 대통령이 하자있는 정치만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을 괴롭히는 고작은 주변에서부터 강도 높게 이뤄져 왔다. 이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언론이다. 주력 언론들은 본위의 역할을 상실한 채, 오히려 스스로가 국민의 환멸을 살 만큼, 대통령을 연일 공격하여 후보자 당시의 개혁적이고, 독특했던 이미지를 독선적이고 때론 무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바보 이미지로 바꿔버렸다.

특검을 통한 정치인의 비리를 폭로함으로써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을 정계와 긴장관계로서 탈바꿈하게 한 것이나, 고유 영역, 역할을 훨씬 벗어나 정치를 주도하려고까지 오해받을 언론들의 만용에 대해 언론통폐합 같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 등 불합리하지만, 건드릴 수 없었던 말 그대로 너무나 정치적인 조직들에 대해 과감하게 접근했다.

방법적인 면에서, 또 대통령의 그에 대한 처신 등은 별개의 문제로 두고 그러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참신성과 용기는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임기 말 간판정책이라 호도되는 한·미 FTA체결은 세계적 추세이자 앞으로의 대통령도 이어서 발전시켜 갈 것인 바, 졸속체결이라느니 마지막 카드니 라는 식의 비판은 본질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로마를 이어온 것은 간판스타 황제들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각 개별의 역할이 있었다. 기존의 체계를 완전히 엎고, 새로 시작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왕이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정도 된다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처럼 기존에 무너진 질서만 회복하고, 정비하는 역할을 한 황제도 있고, 이를 지속하고 유지해서 다가온 오현제 시대를 가능하게 한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있다.

성과가 크든 작든, 재임기간이 길던 짧던 그런 모든 황제들의 치적들이 모여 로마의 유구한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간판스타급은 아니지만, 한국 정치의 민주화에 공격적으로 나선 최초의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장애물, 그리고 또 다른 시작

노 대통령은 개인 처세와 언론의 공격이 어우러져 마침내 그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지지율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이 대통령을 홀대한다. 국민의 손에 뽑혔으면서도, 국민에 의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노 대통령.

국민이 민주국가에서 정치의 뿌리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통령의 권위마저 쥐어 잡고 흔들기를 바라는 것은 '국민의 만용'이 아닐까. 자신들이 투표를 통해 부여한 권위를 도로 뺐어오는 행위이자, 부정하는 이치다. 이 와중에 들리는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는 저자가 말했듯, 인간은 자신이 산 시대를 가장 가혹하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 대통령 선거가 올해 말에 치러진다.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선택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따르는 것도, 투표권 행사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리더에 대한 복종이 아닌, 최소한의 존경심은 있어야 할 것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정치인의 날조, 언론의 공작→정치 불신→무관심'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고 성숙한 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새 지도자 역시, 과거의 강압적인 권력이 아닌, 합리성과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변화는 그만한 진통을 수반하는 데, 문제는 아직 이 진통을 국민이 감내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적인 지도자만 바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인 국민도 이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실력중심 사회, 패배자에 대한 관용, 강한 리더십, 실용주의적 생활, 'case by case'에 입각한 정치 등 배울 점을 온 책에 산재해 있지만,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그러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과 그 인물을 국민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생각하는 바, 안타까울 뿐이다.

시간이 흐른 후에 등장했더라면, 노 대통령의 공격적인 정치행보가 독단이 아닌, '적극적 개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단 나뿐일까. 그렇지만 그렇게 겪어 온 지난 4년의 기간이 쇠퇴기의 위기가 아니라, 앞으로 한국 정치의 번영을 가져오는 위기의 시간이라 믿고 새 대통령을 선출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가 조용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글쓰기 대회 응모작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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