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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위인을 고른다면 여러 명으로 갈라지겠지만, 가장 존경할 만한 '왕'을 고르라고 하면 사실상 단일 후보로 압축이 된다. 30년째 대한민국의 최고권 고액에 그 얼굴이 등장하는 사람. 바로 세종대왕이다.

정확히는 세종이지만 뒤에 대왕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어색해질 정도로 세종대왕은 우리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다. 아니 세종대왕이라는 이름을 사랑하는 데에는 무의식적으로 '세종대왕은 휼륭하다'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각인'이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세종대왕이 역사상에 길이길이 남길 뛰어난 치적을 가진 최고의 군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역시도 인간이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해 완전무결한 완벽한 군주인 듯이 말하면 나는 약간의 거부감이 든다.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그래서 나는 세종의 허점을 생각하면서 그를 좋아한다.

이러한 내 기준은 로마시대의 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스키피오도, 한니발도, 술라도, 폼페이우스도, 심지어 저 절대적인 천재 카이사르도 내 기준에는 그렇게 완벽한 인간은 아니다. 나는 완벽한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가진 한계성도 알기에 완벽함으로 칭송되어지는 인간이 오히려 더 허점투성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나는 시오노의 '로마인'들 중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허점은 충분히 드러난다. 그 한계성이 나는 너무나도 좋다. 그도 인간이라는 걸 알기에. 그래서 그의 허점마저도 나는 좋아한다.

바로 그 하드리아누스에 대해서 읽으면서 나는 문득 그를 세종과 비교해 보고 싶었다. 물론 둘이 등장한 시대도 다르고 자라난 환경도 다르고 역량도 틀리고 결정적으로 성격도 완전히 틀리지만 문득 이 둘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 더 능력이 높다. 이런 비교는 아니다. 나는 왜 이들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세종이 아버지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과정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유교국가의 왕위계승절차에 따르면 세종은 애시 당초 왕위에 오를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고, 무력으로 인해 정권을 잡은 태종은 유교국가의 승계원칙인 장자 우선제도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입장이었다.

세종이 왕위로 오르는 유무형의 통로가 막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그가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비행이 컸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회자되는 양녕의 세자자리 양보설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이 임금 자리에 자질이 없다는 걸 알고 있던 양녕이 자질이 있던 충녕대군, 즉 훗날의 세종을 임금에 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비행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양녕대군이 사실상의 세자 퇴출 통보를 받기 위해서 아버지 태종 이방원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는 충녕대군과 만나게 된다. 그는 거기서 충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에게 내 비행을 고해 바친 사람은 너다"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우리는 여기서 세종 역시도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권력에 욕심이 없고 봉사할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사람'을 지도자로 원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오히려 나라가 더 피폐해 진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준다.

충녕대군, 훗날의 세종 역시도 욕망이 있었다. 나라를 운영해 보고 싶은. 그것을 사전에서는 권력이라 한다. 그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는 '장자 계승원칙'을 위반한 불완전한 권력 계승이었다.

하드리아누스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는 일치감치 선황인 트라야누스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주목받았지만 결국 그가 황제위에 오른 것은 트라야누스의 죽음 직전에 이루어졌다는 양자계승에 의해서였다. 그 양자계승은 법적으로는 합법적이었지만 의문투성이였다.

트라아누스의 죽음 직전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측근들이 하드리아누스와 가까운 인척 또는 그의 동조자들이었다는 점이 그러했다. 그리고 평소에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명확한 의사표시를 한 적이 없었다. 후계계승은 갑자기, 그리고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것이 이루어지자마자 트라야누스는 죽음에 이르렀다.

평생에 걸쳐서 원로원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던 트라야누스가 가장 중요한 일인 후임 황제 임명에 대해서는 원로원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은 하드리아누스가 트라야누스의 죽음을 속이고 문서를 위조하여 황제자리에 올랐다고 수군거렸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어진다면 가뜩이나 불완전한 자신의 권력이 더욱더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황제 취임 초기에 그에게 반대하는 반대자 4명을 독단으로 숙청해버렸다. 이후 이루어지는 그의 행동에 미루어봤을 때 이는 그가 결코 평범한 황제로 남지 않겠다는 결의를 공개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도 뛰어난 두뇌와 현실인식 능력, 그리고 이 모든 걸 가진 강력한 의지를 지닌 채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세종이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그런 생각을 했듯이. 그 역시도 그랬다.

그리고 이 둘이 가장 뛰어난 군주로 군림하게 된 것도 역시 그러했다. 세종이 숨을 거둘 때 조선왕조실록은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 소식을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말로 그의 치세가 어떠했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둘 모두 자신이 노력한 삶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 그들의 삶은 국가와 그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더 평화롭고, 어떻게 하면 더 번영하게 할 수 있느냐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졌다. 국가의 지도자로서 엘리트로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국가의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만지고, 필요없는 건 버리고, 고쳐야 할 것은 고치며 만들어야 할 것은 만들었다.

모든 제도를 지금에 맞게 고치거나 만들고 후대에 쓰더라도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을 정도로 탄탄하게 만든 건 그들이었다. 그들에게 그런 찬사가 돌아오는 건 당연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도자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그런 자리였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과적으로 세종과 하드리아누스에게 연민을 갖는다. 결국 그들이 노력한 모든 행위들의 대가는 그들이 속한 국가가 그들이 원한 방향이 아니라 퇴조의 길을 걷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왜였을까. 그들은 잘못된 일을 한 걸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종이나 하드리아누스 모두 정상적인 계승 절차 없이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경우 자신의 후계자들도 자신들과 같이 고르기는 지극히 힘들다. 비정상이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비정상이다. 세종이나 하드리아누스 모두 질서를 확립하고 제도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뛰어난 기량을 보이지만, 그건 이후의 체제에서 비정상을 용납하지 못한다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어깨에는 선대에서 만들어 놓은 체제를 굳건히 다져야 한다는 짐이 드리워져 있었다. 결국 시대가 그들에게 창조 대신 개선의 짐을 지운 셈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개개인의 능력 차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그들이 그렇게 왕위에 오른 건 시대가 그것을 원했고, 그 요구에 합당한 사람들이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 일을 너무 휼륭하게 해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이 너무나도 일을 잘 해낸 순간 세종과 하드리아누스는 그들의 후계자들을 자신들과 같이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존 집권세력들이 동의해야 하는 인물로 후계를 선택해야 했다.

그들의 선대들은 세종과 하드리아누스를 선택할 '여유'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들도 선대의 방법을 답습한다면 그들이 손질하고 쌓아올린 체제는 무너졌었으리라.

유교국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야 했던 하드리아누스도 그러했다. 결국 세종은 자신의 장남인 문종을 택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사정이 어떤지 간에 원로원이 좋아하는 인물인 안토니누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세종이 단련시킨 문종은 재능은 있었지만 병약했다. 세종 사후 너무 이른 그의 죽음은 결국 조선왕실에 다시 한 번 피바람을 불러오게 만들었다.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훗날의 세조는 분명 뛰어난 행정가이자 정치가였다.

하지만 그는 그를 왕위에 올려준 공신세력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고, 겉으로는 왕권이 강해보여도 신권이 무럭무럭 자라는 조선의 이 체제는 결국 모순으로 이어져서 조선을 퇴보의 길로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공신의 난립과 그로 인한 조세제도의 붕괴가 조선을 압박하는데 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이 된 원인은 따지고 보면 장남 문종이 허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세자위에 내버려두고 수양대군의 야심을 게을리 한 세종에게 있었다. 하지만 세종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였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어떤가. 하드리아누스가 철벽같이 다져놓은 경계선 덕택에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처럼 국경을 다니면서 순시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안토니누스 자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2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이탈리아 밖으로 나가지 않은 그의 치세 덕분에 로마 엘리트 계층은 허약해져버렸다.

국경의 장병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의 변화를 그들은 눈치 채지 못했고, 하드리아누스가 선물해준 평화를 누리기에만 바빴다. 보수적인 원로원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안토니누스를 황제로 올린 대가는 그러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부터 시대의 변화는 점차 눈사태처럼 커져 로마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이 역시 하드리아누스도 어쩔 수 없었던 시대의 한계였다.

세종의 뒤를 이은 세조도, 그리고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도 뛰어난 행정가이자 강력한 정치가였다. 하지만 세상은 능력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때문에 화를 입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단순히 시대와의 불화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나는 시대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살고, 그에 대한 대가도 충분히 받았고, 결국 성공적인 삶을 누렸음에도 결국 그 성공 때문에 몰락의 길로 치닫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본다. 성공이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쇄신이 해답이지만, 성공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쓴 사람에게 시대에 맞지 않는 이유로 쇄신을 다시 요구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시대와 맞지 않았던, 그래서 자신의 임계점에 부딪혀서 사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초라한 한계를 연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국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도, 그리고 500년 동안 한반도에서 군림한 조선도 그들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만드는 모든 제도도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만드는 모든 국가들도 한계가 있고, 그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퇴보는 시작된다. 나는 하드리아누스에게서, 세종에게서 그 임계점을 보고 한계를 느낀다. 이는 그들의 탓도 아니고, 그들의 만든 국가의 탓도 아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만든 이후에 영원히 겪어야 할 인간의 한계이다. 그래서 연민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세종을, 하드리아누스를 생각하고 동정한다. 나 역시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이고 우리와 우리의 국가 역시 언젠가 그 길을 걸을게 분명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종과 하드리아누스라는 두 인물을 통해서 한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의 책임의식 또한 느낀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와 그 안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 이후에 그들이 한 행적들이 어떤 형태로 돌아오든지 간에. 그래서 그들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나는 모두 다 긍정한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그리고 사랑하므로.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글쓰기 대회 응모작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세종, #하드리아누스, #로마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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