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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른 햇김은 가스불에 살짝 구워 간장에 싸 먹어야 제맛
ⓒ 이종찬
꽃샘추위 오락가락하던 1970년대 허리춤께
귀신 잡는 해병대 하사였던 큰집 형이 휴가 나온 날
큰어메 큰 맘 먹고 차린 밥상 위에는
쌀이 보일락말락한 보리밥 한 그릇과
숯불에 살짝 구운 푸르스럼한 김 열댓 장
참기름 서너 방울 동동 뜨는 간장 한 종지뿐이었다

그날 옹이 박힌 마루에 앉아 밥숟가락 든 큰집 형은
풀 먹여 빳빳하게 날 선 바지가 구겨지는 줄도 모르고
동네 아이들이 금빛 계급장 달린 모자를 훔쳐가는 줄도 모르고
양키들이 '블랙페퍼'라 불렀다는 시커먼 김 위에
시커먼 보리밥 한 숟갈과 시커먼 간장 쬐끔 올리는가 싶더니
각개전투하듯 고봉밥 한 그릇 뚝딱 비워냈다

해마다 꽃샘추위에 발발 떠는 봄이 오면
그때 그 '검은 종이' 놓인 밥상이 자꾸 눈에 어른거려
재래시장에 나가 마른 햇김 한 다발 사서 가스불에 살짝 굽는다
아뿔싸! 보리쌀 하나 없는 하얀 쌀밥 부끄러워
참기름 추억처럼 동동 뜨는 간장 끼얹어 서둘러 입에 넣으면
저만치 시멘트 담벼락 아래 계급장처럼 노오란 양지꽃 피어난다

- 이소리, '검은 종이가 놓인 밥상' 모두


▲ 가까운 재래시장에 나가보면 빛깔 고운 햇김이 가게마다 수북히 쌓여 봄철 잃어버린 입맛을 돋구고 있다
ⓒ 이종찬
▲ 김은 이른 봄이 되어야 향기가 많이 나고 고소한 맛 또한 그만이다
ⓒ 이종찬
불에 살짝 구워먹는 햇김은 '밥 도둑'

햇김이 제철을 만났다. 가까운 재래시장에 나가 보면 빛깔 고운 햇김이 가게마다 수북이 쌓여 봄철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고 있다. 이른 겨울부터 늦은 봄까지 남해안과 서해안의 푸르고 맑은 바다에서 어부의 손에 의해 건져져 햇살에 바싹 말려진 김은 이른 봄이 되어야 향기가 많이 나고 고소한 맛 또한 그만이다.

특히 마른 햇김은 불에 살짝 구워먹으면 밥 도둑이 따로 없을 정도로 감칠맛이 뛰어나다. 값 또한 마른 햇김 100장에 싼 것은 7천원에서부터 비싸 봐야 1만원 정도 하니 다른 밑반찬에 비해 싼 편이다. 게다가 밥상 위에 마른 햇김 구운 것과 간장 한 종지만 있으면 다른 밑반찬도 그리 필요치 않으니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닌가.

요즈음 사람들은 대부분 바쁘다는 핑계로 미리 조리되어 있는 양념 김을 사서 즐겨 먹는다. 하지만 가까운 시장에 가서 마른 햇김 한 다발 사서 한 장 한 장 꺼내 가스불에 살짝 구워먹어 보라. 가게에서 파는 느끼한 맛이 밴 양념 김에서 느낄 수 없는 바삭바삭한 햇김의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리라.

흔히 사람들은 김, 하면 언뜻 김밥이나 백반에 딸려 나오는 양념 김만을 떠올리기 쉽다. 이는 건강에 아주 좋은 김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다. 김은 비빔밥이나 볶음밥, 떡국, 수제비, 콩나물국밥 등에도 양념처럼 들어가지만 조리 또한 다채롭다. 물김으로 만드는 김국과 김무침에서부터 김조림, 김장아찌, 김튀김, 쌈 등등.

▲ 마른 햇김을 한 장 한 장 가스불에 살짝 굽는다
ⓒ 이종찬
▲ 푸르스럼하게 잘 구워진 마른 햇김
ⓒ 이종찬
김 파는 아낙네들이 나타나야 봄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허리춤께, 나그네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하더라도 동산마을(지금의 창원시 사파동)에서는 봄철이면 집집이 김으로 만든 조리가 밥상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살던 마을은 바다를 낀 마산과 진해가 가까워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자연산 물김과 마른 김이 흔했다.

김값 또한 거의 공짜라 할 정도로 쌌다. 특히 이른 봄이면 마산과 진해의 바닷가 주변에 사는 아낙네들이 물김과 마른 김이 가득 담긴 커다란 고무 대야를 머리에 이고 마을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김을 팔러 다녔다. 그 때문에 나와 동무들은 김을 파는 아낙네들이 우리 마을에 나타나야 봄이 오는 줄 알았다.

게다가 마을과 야트막한 산등성이 곳곳에 서 있는 매화나무와 명자꽃, 산수유꽃 등도 김 파는 아낙네들이 우리 마을과 이웃마을을 오락가락할 때부터 하양 빨강 노랑 꽃망울을 툭툭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을을 찾아오는 봄은 구릿빛 얼굴을 가진 아낙네들의 큼지막한 대야 안에 담긴 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때 보리쌀 몇 되와 김을 바꾼 어머니께서는 물김은 맑은 우물물에 오래 담가뒀다가 잔 파와 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주물러 무침을 만들었고, 마른 햇김은 장작불에 살짝 구워 간장과 함께 밥상 위에 올렸다. 그때 참기름 두어 방울 떨어뜨린 간장과 함께 싸먹는 그 향긋하고도 고소한 보리밥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말린 햇김에는 식이섬유가 아주 많아 비만, 당뇨병 예방과 치료에도 뛰어난 효과가 있다
ⓒ 이종찬
▲ 양념은 간장에 고춧가루를 살짝 뿌린 뒤 참기름 서너 방울을 톡톡톡 떨어뜨리면 된다
ⓒ 이종찬
김은 노화와 암, 비만, 당뇨, 위장병 등에 아주 좋은 건강식품

맑고 푸른 바다의 바위틈에 이끼처럼 붙어서 사는 자연산 김은 이른 겨울부터 늦은 봄까지 가장 잘 자란다. 더불어 김은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뒤 곧바로 김발에 적당한 크기로 펴서 햇살에 며칠 동안 바삭바삭하게 말리므로 사람 몸에 아주 좋은 여러 가지 영양소가 그대로 살아 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김은 단백질과 칼슘, 철, 비타민 등이 들어 있는 건강식품이다. 또 김에는 눈에 좋은 비타민A가 듬뿍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노화와 암을 막아주는 항산화물질인 비타민C도 많이 들어 있다. 특히 말린 햇김에는 식이섬유가 아주 많아 비만, 당뇨병 예방과 치료에도 뛰어난 효과가 있다.

중국 명(明)나라 때의 본초학자 이시진(1518∼1593)이 엮은 <본초강목>에는 "청해태(김)는 위의 기(氣)를 강하게 하며 위가 아래로 처지는 것을 막는다"고 쓰여 있다. <동의보감>에는 "김의 맛은 달면서 짜고 성질은 차다, 토사곽란으로 토하고 설사하며 속이 답답한 것을 치료하며 치질을 다스리고 기생충을 없앤다"고 적혀 있다.

마른 햇김은 우리나라 정월 대보름 풍습 속에도 나온다. '복쌈'이 그것이다. 오곡으로 지은 보름밥을 마른 햇김에 큼지막하게 싸서 먹는 복쌈은 특이하게도 보름음식인 시금치, 취나물과 함께 싸서 먹는다. 또 우리 조상들은 "복쌈은 눈이 밝아지고 명(命)을 길게 한다"해서 '명쌈'이라고도 불렀다.

▲ 구운 김을 시금치나물에 싸먹는 맛도 별미다
ⓒ 이종찬
▲ 묵은지와 시금치나물, 볶은 어묵, 단무지 등을 구운 햇김에 싸먹는 맛도 색다르다
ⓒ 이종찬
마른 햇김은 가스불에 살짝 구워 간장에 싸 먹어야 제맛

마른 햇김을 쌈으로 조리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가정에서는 대부분 마른 햇김에 참기름을 바른 뒤 약한 불에 프라이팬을 올려 소금을 뿌려가며 살짝 구워낸다. 하지만 이렇게 구워낸 마른 햇김은 맛이 약간 느끼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먹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눅눅해져 바삭바삭한 맛이 사라진다.

마른 햇김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향긋하면서도 고소한 맛과 바삭바삭 부서지는 깔끔한 뒷맛을 보다 한 차원 높게 즐기기 위해서는 마른 햇김에 아무런 양념을 하지 말고 그대로 가스불에 살짝 구워 내는 것이 좋다. 양념은 간장에 고춧가루를 살짝 뿌린 뒤 참기름 서너 방울을 톡톡톡 떨어뜨리면 된다.

밥 한 그릇이 놓인 밥상 위에 마른 햇김 구운 것과 간장 한 종지만 달랑 올려놓는 것이 좀 어설프게 여겨진다면 묵은지와 시금치나물, 볶은 어묵, 단무지 등을 밑반찬으로 올리면 된다. 구운 햇김을 밥과 함께 간장에 싸먹는 것이 정식이라고 한다면 묵은지나 시금치나물, 볶은 어묵, 단무지 등과 함께 싸먹는 맛은 별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른 햇김이 가지고 있는 향긋한 바다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간장과 함께 싸먹는 것이 으뜸이다. 구운 마른 햇김은 다른 맛을 내는 반찬이 들어가지 않고 쌈의 간을 맞춰주는 간장만 들어가야 비로소 제맛이 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마른 햇김을 쌈으로 먹을 때 오징어나 주꾸미 양념 볶음을 얹어 먹는 것도 별미 중의 별미.

▲ 구운 김에 밥과 시금치를 올려 싼 쌈
ⓒ 이종찬
"입맛 없을 땐 구운 햇김 이게 최고야"

"푸름아! 배 안 고파?"
"아까 학교 마치고 오다 친구들이랑 오뎅 좀 사 먹었어."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배가 별로 안 고파. 요즘 따라 입맛도 별로 나지 않고."

"너, 봄 타는구나. 원래 봄이 되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입맛이 떨어지는 거야. 그래도 뭘 좀 먹어야지? 빛나는?"
"반찬 뭐 있어?"
"마른 햇김 구워먹으려고 하는데?"
"아싸! 그렇찮아도 그때 아빠가 구워주는 그 김이 먹고 싶었는데."

"오늘 저녁 김 구워 먹을 거야? 그러면 나도 밥 조금만 줘."
"왜? 너는 양념 김만 좋아하잖아."
"아빠가 구워주는 그 김이 맛이 가장 좋아."
"입맛 없을 땐 구운 햇김 이게 최고지."


요즈음처럼 온몸이 나른하고 입맛이 뚝뚝 떨어지는 봄날. 마른 햇김을 가스불에 살짝 구워 빨간 고춧가루 위에 참기름이 동동 뜨는 짭조름한 간장과 함께 한 쌈 먹어보라. 향긋하고 고소하게 혀끝을 감도는 구운 햇김의 깊은맛에 그동안 잃어버린 밥맛과 찌뿌드드했던 몸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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