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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며루치회의 제맛을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싱싱한 생며루치로 구해야지예."
ⓒ 이종찬
박박머리 빛내며 국민학교 다닐 때 나는
며루치가 어부의 푸른 피멍 박힌 바다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부엌 앞 커다란 장독대에서 사는 줄 알았다

숭숭 돋는 콧수염 으스대며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아버지 손마디처럼 껍질 숭숭 벗겨진 어른 며루치는
맛국물로 우려내 찌개나 국을 만들 때 쓰고
누이 새끼손가락처럼 작고 귀여운 아기 멸치는
볶아먹거나 고추장에 찍어먹는 음식인 줄 알았다

나도 몰래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의 나는
며루치도 횟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나는 며루치를 먹고 자랐고
속이 쓰릴 때마다 구수한 며루치 맛국물로 달랬다
내 밥상에 며루치가 오르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다

봄날, 오랜만에 살가운 벗들과 목로주점에 앉아
은빛에 감춘 붉은 속살 슬쩍슬쩍 드러내는 널 먹는다
나는 지금껏 네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
나는 널 씹으며 나를 씹고
널 통해 이 세상을 읽는다

사랑은 한몸을 바치는 것이다
이 독선적인 사랑!
날 원망 마라
다음 생엔 나 반드시 며루치 되어
네 식탁 위에 올라 내 한몸 기꺼이 던질 테니

- 이소리, '며루치회를 먹으며' 모두


▲ 물빛 푸른 남녘바다 곳곳에서는 이른 새벽마다 그물에 걸린 봄 멸치를 터는 어부들의 땀내 배인 소리가 가득하다, 기장 대변항 앞바다.
ⓒ 이종찬
▲ 기장 대변항에서 어부들이 봄 멸치를 털고 있다.
ⓒ 이종찬
지금 남녘 바닷가에서는 싱싱한 봄 멸치가 팔딱팔딱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3월로 접어들면서 물빛 푸른 남녘바다 곳곳에서는 이른 새벽마다 그물에 걸린 봄 멸치를 터는 어부들의 땀내 밴 소리가 가득하다. 멸치를 털고 있는 부둣가 곳곳에서는 그물에서 막 떨어지는 싱싱한 봄 멸치를 재빠른 칼 놀림으로 횟감으로 송송송 썰고 있는 아낙네들의 손길도 더없이 바쁘다.

부둣가 주변에 촘촘촘 늘어선 식당에도 생멸치회, 멸치구이, 멸치국이란 글씨가 다른 차림표를 비웃으며 큼지막하게 나붙어 있다. 부둣가 저만치 기기묘묘한 바위틈에는 금방 무친 맛깔스러운 봄 멸치회를 안주로 삼아 소주를 비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흔하다. 바야흐로 칼슘의 왕 멸치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지금, 마산 어시장 골목과 부림시장 음식점 곳곳에서도 은빛 비늘 속에 붉은 속살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싱싱한 봄 멸치회가 눈에 흔히 띈다. 이 지역 사람들 또한 서로 만났다 하면 봄 멸치 얘기로 입을 뗀다. 저만치 목로주점에 앉아 대낮부터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의 술안주 또한 멸치회다.

간혹 멸치구이와 멸치국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생멸치의 뼈를 추슬러내고 은빛 비늘 약간 붙은 불그스름한 살만 발라내 양념장과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은근슬쩍 버무린 멸치회를 즐긴다. 마치 지금 멸치회를 맛보지 못하면 평생 멸치회 구경조차 할 수 없다는 듯이.

▲ 뼈를 추리고 살만 발라낸 생멸치 살.
ⓒ 이종찬
▲ 요즈음 마산 어시장에는 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싱싱한 햇멸치가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 이종찬
어린이의 성장, 임산부, 여성의 골다공증에도 아주 좋은 멸치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멸치는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작은 바다 생선이다. 한때 생선 구경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산간벽지에서도 멸치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누구나 값싸게 쉬이 먹을 수 있는 서민적인 음식이었다. 멸치는 여러 가지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때나 김장을 담글 때에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재료이다.

마른 멸치는 반찬이나 술안주로 좋고, 갓 잡은 굵은 멸치는 횟감이나 소금구이, 찌개, 국, 젓갈용으로도 더없이 뛰어나다. 멸치는 또한 머리에서부터 내장까지 통째로 먹을 수 있으므로 다른 바다 물고기에 비해 경제적이다. 게다가 멸치에 듬뿍 들어 있는 단백질과 칼슘 등은 어린이의 성장을 돕고, 임산부나 여성의 골다공증에도 아주 좋다.

1960년대 허리춤께,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께서는 밥상 위에 멸치볶음을 자주 올렸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고소한 멸치볶음보다 마른 멸치를 한 줌 밥상 위에 올려 통째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을 더 즐겼다. 아버지께서는 들에서 일을 하시다가 중참을 드실 때에도 막걸리 반 되에 마른 멸치 몇 개, 고추장 한 종지만 있으면 꽤 즐거워하셨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이 신경질을 자주 내거나 빈혈증상을 보일 때면 마른 멸치를 도구통에 콩콩 찧어 가루를 내 보리밥 위에 솔솔 뿌린 뒤 고추장과 참기름 서너 방울 떨어뜨린 간장에 쓱쓱 비벼먹게 했다. 그때 먹은 멸치비빕밤은 고소하면서 맛도 좋았지만 신기하게도 그렇게 몇 끼니 먹고 나면 신경질이나 빈혈이 뚝 그쳤다.

▲ 생멸치회는 싱싱하면서도 그 맛이 바다 속처럼 깊다.
ⓒ 이종찬
▲ 생멸치의 고소한 맛 속에 은근히 입천장을 톡톡 쏘는 매운맛과 달착지근하게 넘어가는 감칠맛.
ⓒ 이종찬
물럿거라! 싱싱한 봄 멸치회 나가신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멸치는 한자어로 멸치(蔑致), 멸어(滅魚), 수어(水魚)라 부르는데, 멸치, 멸어는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며, 수어는 물에서 나는 물고기의 대명사로 쓰인다. 멸치의 우리 말은 물의 옛말인 '미리'이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미리'가 '며리', '멸'로 바뀌었으며, 여기에 물고기를 뜻하는 '치'를 붙여 지금의 '멸치'가 되었다.

청어목 멸치과의 바닷물고기인 멸치는 몸이 길고 원통 모습이다. 멸치의 빛깔은 등 쪽이 암청색이며, 배 쪽은 은백색으로 옆구리에 은백색의 세로줄이 있다. 멸치가 알을 가장 많이 낳는 때는 5∼8월이다. 하지만 멸치는 겨울을 빼놓고는 거의 1년 내내 바다 속 20∼30m 깊이에서 캄캄한 밤중에 알을 낳는다.

정약전(1758∼1816)이 지은 <자산어보>에 따르면 멸치는 몸이 매우 작고, 큰놈은 서너 치, 빛깔은 청백색이며, 6월 초에 연안에 나타나 서리 내릴 때(霜降) 물러가며 밝은 빛을 좋아한다. 더불어 "밤에 어부들은 불을 밝혀 멸치를 끌어들여 손 그물로 떠서 잡는다, 이 물고기로는 국이나 젓갈을 만들며 말려서 포도 만든다"고 쓰여 있다.

칼슘의 왕, 단백질의 왕이자 생선의 왕 멸치. 요즈음 마산 어시장에는 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싱싱한 햇멸치가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이곳에 가도 생멸치요, 저곳을 둘러보아도 생멸치다. 특히 마산 어시장을 끼고 있는 부림시장 식당 곳곳에는 온통 멸치회가 다른 음식을 마구 비웃고 있다. 언뜻 봄 멸치회 축제라도 열린 듯하다.

▲ 생멸치회는 주로 술안주로 많이 먹지만 비빔밥으로도 그만이다.
ⓒ 이종찬
▲ "봄 며루치회 이기 술로 자꾸 더 멕이네."
ⓒ 이종찬
"살아 있는 며루치로 회를 뜨는 줄 알지예"

"며루치회의 제맛을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싱싱한 생며루치로 구해야지예. 간혹 며루치회를 처음 먹는 사람들은 며루치도 회니까 살아 있는 며루치로 회를 뜨는 줄 알지예. 하지만 며루치는 그물에 걸리는 순간 죽어버리기 때문에 금방 죽은 며루치를 막걸리에 씻어 살을 발라내 양념과 채소를 넣고 무쳐 먹어야 제맛이 납니더."

지난 17일(토) 오후 6시. 경남지역 문화예술인들의 토요모임 '미리내'에 참석하기 위해 들렀던 부림시장 맞은 편 골목에 있는 작고 초라한 대포집. 부림시장 상인들과 이곳을 지나치는 손님들의 끼니를 위해 밥집을 겸하고 있는 이 목로주점은 나그네가 토요일마다 모임 때문에 잊지 않고 찾는 곳이다.

이 집은 주변 사람들에게 제철을 맞은 신선한 바다 물고기를 맛깔 나게 조리하는 집으로 이름이 높다. 겨울에는 쫄깃쫄깃 고소한 포항 구룡포 과메기가 있고, 봄에는 입에 살살 녹는 생멸치회와 향긋하게 오도독 씹히는 미더덕찜, 여름에는 맵싸하면서도 감칠맛이 깊은 가오리찜과 아귀찜, 가을에는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싱싱한 전어회를 맛볼 수 있다.

특히 멸치가 가장 많이 잡히고 맛이 좋은 봄철인 요즈음, 이 집에 가서 먹는 생멸치회(3∼4인분 15000원)는 싱싱하면서도 그 맛이 바다 속처럼 깊다. 이 집 멸치회는 입에 넣으면 금새 혀끝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불그죽죽한 생멸치의 고소한 맛 속에 은근히 입천장을 톡톡 쏘는 매운맛과 달착지근하게 넘어가는 감칠맛이 그만이다.

▲ 생멸치회의 고소하고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깊은맛.
ⓒ 이종찬
고소하고 매콤하면서도 새콤달콤한 깊은맛에 밤새는 줄 몰라

이 집에서 봄철 갓 잡은 생멸치로 회를 만드는 방법은 좀 독특하다. 먼저 싱싱한 생멸치를 막걸리나 소주에 씻는다. 그렇게 해야 멸치가 가지고 있는 비린내도 사라지고 회를 뜨면 금세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멸치의 살을 단단하게 할 수 있기 때문. 그 다음에는 양념장과 과일, 채소를 준비하고 생멸치 살을 발라낸다.

이 집 생멸치회의 고소하고도 새콤달콤한 깊은맛은 양념장과 과일, 채소에 있다. 양념장은 고추장과 물엿, 흑설탕, 식초, 양파즙, 레몬즙을 넣어 만든다. 이어 살을 발라낸 생멸치에 양념장을 붓고 송송 썬 사과와 당근, 양배추, 양파, 매운 풋고추, 마늘을 넣어 살짝 버무린 뒤 싱싱한 상추 위에 올려 땅콩가루를 살짝 뿌리면 끝.

생멸치회는 주로 술안주로 많이 먹지만 비빔밥으로도 그만이다. 이 집에서 술안주로 먹고 남은 생멸치회에 쌀밥 한 공기 비벼 상추에 싸먹는 맛도 별미 중의 별미다. 그날, 나그네는 살가운 벗들과 함께 밤늦도록 생멸치회의 고소하고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깊은맛에 폭 빠져 큰 대포를 세 통이나 시켜먹었다. 상큼한 봄밤이었다.

"봄 며루치회 이기 술로 자꾸 더 멕이네."
"괜찮다. 봄 며루치회 이거만 있으모 밤새도록 암만(아무리) 술로 퍼마셔도 술도 잘 취하지도 않고 아침에 일어나도 속이 까딱없다카이. 봄 며루치회 이기 술도둑 아이가."
"내 참, 언젠가는 살짝 농익은 며루치 젓갈 그기 밥도둑이라카더마는…."
"봄 며루치 이기 술도둑도 되고 밥도둑도 된께네 완전히 사람 잡는 왕도적 아이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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