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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판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데빌맨>의 한 장면
1972년판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데빌맨>의 한 장면 ⓒ 도에이동화
<데빌맨>은 악을 이기기 위해, 악이 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나의 전제가 있다면, 영혼은 맑고 순수해야 하며, 정의에 대한 의식이 뚜렷해야 한다는 것. 주인공 '후도우 아키라(해적판-경수)'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친구 '아스카 료(해적판-기철)'의 제의로 악마 '데몬'과 합체, '데빌맨'이 된다.

<데빌맨>에 따르면,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되기 전에는 악마가 지배자였으며, 부활을 꿈꾸는 그들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데빌맨'의 활약이 시작된다고 한다.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언급한 그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도 선대의 지배자인 악마와 연관이 있다는 흥미로운 설정도 등장한다.

거기에 백년전쟁 당시의 잔 다르크의 활약이나 마리 앙투와네트와 프랑스대혁명 등의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도 악마의 개입으로 유발된 사건이란 가설도 그럴듯하게 그려진다. 그만큼 '악'이 우리의 실생활이나 역사와도 긴밀한 관계를 이루었다는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데빌맨'이 된 아키라는 악마가 됐다기보다, 악마의 능력을 얻은 '변신 캐릭터'에 가깝다는 점이다. '데빌맨'이 되면서 변화한 인간형도 '악마'라기보다는 터프가이 쪽에 가깝다. 소심하고 유약하던 '아키라'를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던, 소녀 '미키(해적판-은하)'도 갑자기 변한 그를 이상해하기보다, 점점 이성으로 생각하는 재미있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데빌맨'은 악과 싸우면서 악에 씌인 인간과도 잦은 충돌을 경험한다. 여기서의 '악'은 인간 본연의 본능이라기보다, 악마들의 소행으로 인해 씌인 것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악의 유혹으로부터 너무나도 미약한 인간의 약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는 '한니발 렉터'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안소니 홉킨스의 '한니발 렉터'는 악과 쾌락의 화신으로 완성된 이미지였지만, <한니발 라이징>에서의 가스파르 울피르의 '한니발 렉터'는 자신조차 몰랐던 악의 본능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악은 쾌락과 함께 달콤하면서도 두려운 목소리로 다가온다. 인간은 달콤함, 그리고 두려움에 약하다. 그래서 악에 미약한 것 같다.

악은 공포로부터 비롯된다?

<아몬 데빌맨 묵시록>의 한 장면
<아몬 데빌맨 묵시록>의 한 장면 ⓒ 스튜디오 라이프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드래곤 헤드>는 공포로부터 미약한 인간의 한계를 '천재지변'이라는 매개를 이용해 그려나간다. 이 부분에서는 모치즈키 미네타로도 나가이 고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데빌맨>에서 지적하는 악의 출발도 공포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쓰러뜨리는 것은 정글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법칙이다.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더 강한 자를 만나면 쓰러진다. 자신이 쓰러지고 무너진다는 두려움은 진정한 공포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자신보다 약한 자를 쓰러뜨리면서 그 공포를 잊으려 하려는 면이 있으며, 거기에서 쾌락을 느끼는 예도 있다.

공포는 그런 방식으로 서로 교환하면서 물려주기도 한다. 나가이 고의 지적대로라면, '지옥'은 여기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가이 고는 '료'의 입을 빌려, "어두운 것을 싫어하며, 집단을 만들어 두려움을 극복하고 안전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은, 그 공포의 틈을 파고들 악마로부터의 대비"라는 주장도 전개한다.

"악마는 너희들 마음 속에 있다. 너희들이야말로 악마다!"

악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진정한 극복은 앞으로도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잠재된 본능일수도 있지만, 인간의 불완전한 한계가 비집고 들어올 틈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데빌맨>의 유명한 대사는, '데빌맨'이 악에 씌인 인간들을 향해 자주 외치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저 대사는 결국 인간의 그런 미약하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적하는 대사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가이 고답게 연민은 느껴지지 않는다. '데빌맨'은 저 레퍼토리와 함께, 악에 씌인 인간들을 주저없이 퇴치한다. 다만 더 이상의 빙의를 막고 남은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할 뿐이다.

악의 정체란 무엇일까? 본능일까? 공포일까? 나가이 고의 <데빌맨>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두 가지 근거를 모두 함축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그린 걸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 명대사대로 어찌됐든 악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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