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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안골에서 화전을 일궈 9남매를 길러내신 할머니
ⓒ 송성영
벌꿀 치는 할머니가 사는 안골(금산군 남이면 석동리)은 첩첩산중입니다. 가도 가도 골짜기만 나옵니다. 작은 골 따라 십리쯤 들어가면 우뚝 솟은 산이 앞을 턱하니 막고 서 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들어왔던 길, 딱 한군데밖에 없어 탈이지만 요새도 이런 요새가 없다 싶습니다.

예전에는 여기저기 산 귀퉁이에 열 가구 가까이 터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벌꿀 치는 할머니네를 합쳐 3가구가 전부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은 할머니네처럼 안골 토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쌀독에 김치 항아리 묻어 놓고 붙박이로 생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집 주인은 오두막집을 산채 삼아 금산을 오가며 칡이나 약초를 캐서 겨우겨우 생활하는데 약초 캐러 오는 날이면 냉방에 군불 지펴놓고 하루 이틀씩 묵어가기도 한답니다.

▲ 첩첩산중, 골따라 십리쯤 들어가다보면 만나는 안골, 3가구가 산다
ⓒ 송성영
또 한 사람은 외지 사람입니다. 그이는 몇 년 전 이곳 안골에 이사와 근사한 목조주택을 지어 놓고 삽니다. 대전을 오고가며 뭔가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가까이에 살고 있지만 꿀 치는 할머니네와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할머니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날씨가 추우니까 얼른 들어오라며 낯선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 줍니다. 할머니는 산도적처럼 생겨먹은 낯선 사람이 전혀 꺼림칙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꺼림칙하거나 험악한 세상인심 따위는 험악하게 꺼림칙하게 사는 인간들에게 떠맡겨 놓은 지 이미 오래 된 듯싶었습니다.

할머니는 방 한 켠에 지난 가을 벌통에서 따 놓은 꿀통을 쌓아 놓고 그걸 상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겨울에 작업하고 있는 꿀은 가을에 따 놓은 꿀들이랍니다. 설 대목을 앞두고 꿀통을 꺼내 손을 보게 되는데 꿀 통째로 포장해 상품을 만들거나 밀납을 제거하고 온전히 꿀만 걸려내 꿀병에 담아 팔기도 한답니다.

▲ 산도적처럼 생긴 생면부지들에게 꿀을 내놓으셨다.
ⓒ 송성영
할머니는 꿀을 한 종지 내놓으십니다. 도시와 붙어 있는 시골인심하고 산골인심하고 또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골은 시골을 사이에 두고 도시와 많이 떨어져 있으니까요. 아니, 도시이건 시골이건 산골이건 사람 나름입니다. 인심을 베풀고 안 베풀고는 할머니 맘 아니겠습니까?

"몇 년 전에 공부하는 막내 자식 밥 해 먹인다구 도시서 살았는디."
"어디서유?"
"서울서 살았는디, 어디가서 입맛 한번 다실띠가 읎드라구, 사람덜은 많아두 사람덜을 못 봐, 마실 갈띠두 읎구."

"경로당 같은디 있잖유?"
"경로당? 그런대두 돈 있어야 혀, 돈 없으면 못가, 대우 못 받어, 돈 있어야지 대우 받어."

"그래도 여긴 사람덜 구경하기 힘들잖유?"
"그래두 여기가 훨씬 좋아, 나는 인저 껍데기여 껍데기이, 껍데기만 남았어, 아퍼서 힘들어, 이것두 예전에는 많이 했는디, 이거 별루 남는 거 읎어, 설탕 값은 비싸고 꿀 값은 헐하고, 그러니 지금 젊은 사람 덜이 누가 이 일을 헐라구 혀."

▲ 꿀통을 쌓아 놓고 설 대목 준비를 하시는 안골 할머니
ⓒ 송성영
달콤한 꿀을 내놓더니 이번에는 이야기보따리까지 술술 풀어내 주십니다. 할머니의 고향은 안골에서 큰 산 몇 개를 넘어 가야 하는 남이면 건천리라고 합니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로 못 먹고 살 때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 잠시라도 손 놓고 있으면 굶어 죽을 판이었던 그런 끔찍한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결혼할 때 남편은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지, 그래서 결혼혔어, 남의 집 머슴은 그래도 먹는 것만큼은 잘 먹었으니께."

잘 먹는다고 해봤자 쫄쫄 굶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땅이란 땅은 몇몇 지주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없이 사는 사람들은 오죽하면 머슴을 살아야만 먹고 살만했겠습니까. 지금은 먹고 살만함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 자본가에게 머슴살이 하는 사람들이 쌔고 쌨지만요.

"살만한가 싶어 시집 왔는디, 노름해서 다 날려 먹었어,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었지, 오두막집까지 다 팔아 먹었으니께, 나중엔 나무 장사를 했는디, 하루 나무 장사하믄 하루 끼니도 못 먹었으니께. 손바닥만한 내 땅은 고사허구 붙여먹고 살 넘땅도 없었어, 그래서 애들에게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이고 싶어서 여기 안골로 들어온 거여. 여기서는 아무 데나 화전을 일궈 먹고 살 수 있었으니께."

할머니네는 안골에 들어와 화전으로 산비탈 다랑이 논밭을 일궜습니다. 조금이라도 공간이 있어 보이면 죄다 논과 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법 머리통이 굵은 자식들은 큰 일손이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 비좁은 안골에서 나락 50가마니를 수확하기도 했답니다. 어린 일곱 남매를 데리고 들어와 자식 둘을 더 낳고 화전을 일구고 벌을 쳐가며 40년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노름 좋아했던 남편이 죽으믄 겁나게 부자 되는 줄 알았는디, 있을 때나 읎을 때나 사는 게 한가지여, 다를 게 없더라구."

원수 같기만 했던 남편이었지만 할머니는 일찍 세상을 뜬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할머니 나이, 올해 일흔 다섯. 자식들은 벌써 다 대처로 떠났고 큰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옛날 생각허믄 나두 오래 살고 있는 거지, 옛날에는 아들 환갑까지 살믄 망령이 들어 잿통에 빠져 죽는다고 했는디, 지금은 증손자 까지 본다니께."

ⓒ 송성영
올해 쉰여덟인 큰 아들은 IMF때 사업 실패하고 홀로 고향에 내려와 양봉에 닭 몇 마리를 기르고 있습니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강원도로 올라가 가을까지 벌치기 노릇을 하고 겨울이면 지게차를 몬다고 합니다. 대처에 사는 자식들 교육비가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급격하게 시력이 떨어져 올 겨울은 쉬고 있다고 합니다.

"이거 다 어떻케 팔어야 헐지 걱정이네, 예전하구는 달러, 잘 안 사가, 선거철이나 설 대목 때가 되면 이 집 저 집 돌린다고 잘 사 갔는디, 지금은 잘 안 사가."

안골에 와서 꿀맛을 봐가며 직접 사가면 2만 5천원에 사갈 수 있다고 합니다. 도매금으로 사가는 것이랍니다. 시중에 나서면 3만 원 이상은 줘야 한다고 합니다.

"이거 설탕 많이 멕인 거라 싼 겨, 비싼 거는 아주 비싸."

할머니는 설탕을 많이 먹였다며 솔직하게 말해 놓고 양동이에 가득 들어 있는 꿀을 떼서 다시 우리 앞에 내놓으며 한마디 덧붙입니다.

▲ 달콤한 꿀을 말끔하게 비워놓았는데 안골 할머니는 "쫌더 먹을텨?'하신다.
ⓒ 송성영
"쫌더 먹을텨? 이것쭘 더 먹어, 파는 것보담 손님들이 맛 뵈기로 먹고 가는 게 더 많다니께, 이거 더 먹구 밖에 나가서 선전 줌 많이 해줘."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할머니 성함을 깜빡했습니다. 전화번호도 어딘가에 적어 뒀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문득 다른 차원의 세계를 다녀온 것만 같습니다. 살아생전 할머니와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나와 할머니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싶네요. 그 사이에 현상계로 계산되는 시간이 존재할 뿐.

덧붙이는 글 | 속을 다 내놓고 살아가는 안골 할머니.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껍데기만 남을 정도로 평생 힘들게 살아오셨지만  할머니의 얼굴에는 절망의 흔적을 읽을수 없었습니다. 절망 그 자체를 녹여 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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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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