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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송성영
"어, 시원하다."
"아빠 방구 꿨어?"
"아니, 빤스가 쫘악 찢어져 엉덩이가 갑자기 엄청 시원해져서 그려."

우리집 작은 아이 인상이 녀석과 함께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군불을 지피고 있을 때였습니다. 엉거주춤 일어섰다가 아궁이에 쑤셔 넣을 나무토막을 집어 들고 다시 제 자리에 주저앉는데 순간, 다 낡은 팬티가 쫘악 찢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엉덩이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응 엄청 시원혀, 한번 볼텨?"

나는 녀석 앞에서 보란 듯이 엉덩이를 까 내리고 찢어진 팬티를 보여줬습니다.

"어디 봐 어디? 어? 정말이네 짜악 찢어졌네, 저번에 나도 학교에서 그랬는데…."
"팬티가?"
"아니 바지가."

녀석의 바지가 어딘가에 걸려 찢어진 것이 아니라 내 팬티처럼 다 낡아 찢어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집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누구네 집 아이가 입었던 옷을 고스란히 물려 입고 다닙니다. 녀석들은 아직까지는 거기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옷이 다 낡아 찢어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드립니다.

이번에 찢어진 내 팬티는 결혼 후 두 번째로 구입한 것입니다. 큰 아이가 올해 열 네 살이니 최소한 7년을 넘긴 장수팬티입니다. 그동안 살짝 찢어진 팬티는 천 쪼가리를 덧대서 기워 입기도 했습니다.

나는 다른 옷가지며 신발들도 마찬가지로 다 낡아 떨어지고 물이 샐 때까지 걸치고 다니는 편입니다. 내 몸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해 온 것들이 그냥 좋기 때문입니다. 좋으니까 별 생각 없이 다 낡아 떨어질 때까지 마냥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시골에 사는 촌놈이 유행 따른 근사한 팬티 입고 어디 가서 패션쇼 할 일도 없잖습니까?

"인상아 너도 바지 찢어질 때 기분이 시원했지?"
"모르겠는데…."

다 낡은 팬티 찢어지는 소리 들어 보셨습니까? "쫘~악" 혹은 "찌~이익"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기분이 아주 상쾌했습니다. 기분 좋은 그 소리, 그동안 여러 차례 그 소리를 들었지만 이번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마음을 닦는 수행자들은 어떤 소리로도 순간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 팬티 찢어지는 소리에 어떤 울림을 들었습니다. 그 울림은 생명을 다하는 소리였습니다. 글재주가 부족해 뭐라고 딱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생명을 다하는 소리는 아름답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내 몸을 감싸 주었던 팬티는 마지막까지 기분 좋은 소리를 내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아름답게 다가왔는지도 모릅니다.

다 낡은 팬티의 찢어지는 소리는 나직합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걸려 제 생명을 다하지 못하고 찢어지는 팬티 소리는 비명에 가깝습니다.

최소한 내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들의 생명을 다 보지 못하고 자꾸만 새로운 것들을 찾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만큼 또 다른 생명을 죽이게 된다고 봅니다. 대자연의 비명소리를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비명소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일이년도 채 안 입은 팬티에 싫증을 내고 좀 더 근사한 팬티를 입으려면 그만큼 돈벌이에 몸을 혹사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돈벌이에 혹사당한 몸에서는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아이들과 아내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방앗간에서 쌀가루를 빻아 시루떡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고 아이들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습니다.

"요게 뭘까?"

새 팬티였습니다. 그리고 수첩이었습니다. 새 팬티는 아빠의 찢어진 팬티를 목격한 작은 아이 인상이 녀석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전화번호를 적어 놓는 작은 수첩은 다 낡아 너덜 너덜거리는 아빠의 수첩이 안타까웠는지 큰 아이 인효 녀석이 궁리해 낸 선물이었습니다.

낡은 팬티만 입다가 새 팬티를 입으니까 어떠냐구요? 당연히 좋지요. 아주 좋습니다. 어렸을 때 엄니께서 명절 때 마다 새주셨던 때때옷을 입을 때처럼 기분이 아주 아주 좋습니다. 그 기분은 다 낡은 팬티를 입어보고 다 낡은 수첩을 가져 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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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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