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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우리집 두 촌놈들이 서울에서 네번째로 타 보는 전철
ⓒ 송성영
몇 년만에 우리 네 식구 모두가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22일 <오마이뉴스> 창간 기념식장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탔습니다. 때마침 빈 좌석이 많았습니다. 아내와 나, 인효와 인상이, 네 명 모두가 편하게 앉아 갈 수 있었습니다.

"인상아, 너 지하철 몇 번째 타 보냐?'
"… 한 네 번째?"
"네 번? 많이 타봤네"
"근데 아빠, 이거 드리면 안 돼?"


갑자기 인상이 녀석이 주머니를 뒤적거려가며 모기만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뭘?"
"이거 돈, 저기 저, 아저씨한테."


@BRI@인상이 녀석은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고 저만치에서 50대 초반의 사내가 양 옆구리에 목발을 하고 우리 쪽으로 아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이의 손에는 빈 밥그릇이 들려 있었습니다. 인상이 녀석의 손에 들려 있는 돈은 선배네 집에서 받은 세뱃돈이었습니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전부였습니다.

"너무 많어, 천원만 드려."
"다 드리면 안 돼?"


아내가 슬쩍 눈을 흘겼지만 인상이 녀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벌떡 일어서서 그 사내의 밥그릇에 5천원을 넣어 주었습니다. 세뱃돈을 받을 때는 부끄러워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던 녀석이 별일이었습니다.

목발 짚은 사내는 인상이에게 거듭거듭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습니다. 순간 내 얼굴이 화끈거려왔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적선을 너무 많이 하니 마니 이런저런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녀석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주고 싶은 마음 그대로를 행했던 것입니다.

순간, 인상이에게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는 목발 짚은 사내가 큰 도인처럼 다가왔습니다. 그 사내가 우리에게 보시의 기회를 주기 위해 마음을 떠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가수 전인권에게 사인을 받고 있는 인효 인상이
ⓒ 송성영
<오마이뉴스> 창간기념 행사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렸습니다. 우리 식구 모두 처음 가보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낯선 환경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데 생각이 단순한 인상이 녀석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빠, 이따가 전인권 아저씨 노래할 때 내가 사진 찍을게."

우리 네 식구 중에서 말투며 행동이며 뭐든 간에 가장 촌스러운 '촌놈'이 바로 인상이 녀석이었습니다. 뭔가를 물어보면 '몰라'로 일관하던 녀석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촌놈'들이 없는 서울에 와보니 화려한 환경에 익숙한 서울 사람들보다도 더 당당해 보였습니다.

나는 이날 큰 상을 받았습니다. 평소 아이들에게 상 받는 것을 별로라고 해놓고 부끄럽게도 온 식구를 데리고 와서 자랑스럽게 상을 받았습니다. 그 소감으로 '환경에 적응이 안 되니…' 어쩌구저쩌구 횡설수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촌놈' 인상이 녀석은 카메라 기자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 어리버리한 아빠를 연방 찍어대고 있었습니다.

행사 끄트머리쯤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인권씨가 도착했습니다. 우리 식구 모두는 가수 전인권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사실 이번에 온 가족이 서울에 올라간 이유 중 하나가 가수 전인권의 노래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들어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막상 가수 전인권이 나타나자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그를 좋아하게끔 만들었던 장본인들인 우리 부부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그를 좋아하니 어쩌니 말도 없었던 인상이 녀석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가서 사인 받아와야지!"
"야, 얌마, 잠깐만, 지금 식사 허잖어, 있다가 혀."


▲ 인상이가 노래하는 가수 전인권을 찍은 사진
ⓒ 송인상
가수 전인권의 노래는 여전히 좋았습니다. 가까이서 그의 노래를 접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한창 젊었을 때부터 그의 노래를 좋아했던 아내도 나도 그의 열창에 흠뻑 빠졌습니다. 특히 요즘 그의 노래 '행진'을 곧잘 따라 부르곤 하는 큰아이 인효 녀석은 싱글벙글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인상이 녀석은 카메라를 들고 무대 앞으로 바싹 다가가 연방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나중에 찍어온 사진을 확인해 봤는데 아주 근사한 사진들이 몇 장 있었습니다. 가수 전인권을 찍고 있는 인상이 녀석의 모습이 스크린에 잡혔는데 그 장면이 찍히기도 했습니다.

"그 사진 알고 찍은 겨?"
"아니, 그냥 찍다 보니까 찍힌 거 같어."


▲ 가수 전인권을 찍고 있는 인상이의 모습이 스크린에 잡혔다.
ⓒ 송성영
앵콜송까지 다 부르고 나서 가수 전인권이 무대에서 내려서자 녀석은 사인을 받겠다며 쪼르르 달려갑니다. 아빠만큼이나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인효 녀석도 함께 따라갑니다. 동생이 워낙 설치고 다녀서 그런지 녀석도 용기가 생겼나 봅니다.

나는 녀석들이 가수 전인권에게 달려가 사인을 받아 오는 것을 보면서 목발 짚은 사내의 빈 밥그릇에 돈을 넣어 주었던 일 또한 그러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상이 녀석이 돈을 건넨 것은 많고 적고를 떠나 그냥 주는 것이 좋아서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수 전인권이 유명하고 안 유명하고를 떠나서 그냥 그의 노래가 좋아서, 그가 좋아서 사인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별 없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기분 좋은 마음을 내는 것, 이런 순수한 마음을 내는 녀석들이야말로 '진짜 촌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녀석들은 서울에서 '진짜 촌놈'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나는 녀석들에 비하면 '진짜 촌놈'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촌놈'이라며 동네방네 나불거리고 다니고 있지만 이것저것 계산해 가며 잔머리를 굴리는 아주 약삭빠른 '촌놈'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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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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