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남희 기자는 지난 4월 3일부터 45일간 시리아, 레바논을 여행하고, 현재 요르단에 머물고 있습니다. 앞으로 5개월간 요르단과 이집트, 수단, 이디오피아, 예맨, 케냐, 탄자니아 등을 더 다니면서 '중동 여행기'와 '아프리카 여행기'로 여러분을 찾아뵐 계획입니다. 이번 여행은 총 6개월을 예정하고 있답니다. <편집자주>
철조망으로 가로 막혀 돌아가지 못하는 난민의 신세를 그린 그림. 샤틸라 캠프.
철조망으로 가로 막혀 돌아가지 못하는 난민의 신세를 그린 그림. 샤틸라 캠프. ⓒ 김남희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산에 기대어 바다를 향해 창을 연 그 도시에 도착한 날, 종일토록 가는 비가 흩뿌렸다. 비가 그친 후 바다 위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그 아스라한 무지개와 푸릇푸릇한 봄산의 풍경만으로도 나는 이 도시가 좋아졌다. 사람이 들기에는 산이 좋고, 바라보기에는 바다가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기도 했다. 도시를 걷다보면 바다는 오래된 연인처럼 기척도 없이 다가와 안기곤 했다.

다운타운에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가 라틴 재즈 선율에 맞춰 “모두가 내게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나는 그저 자유롭고 싶을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될 수 없고, 자유로울 수도 없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다운타운에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가 라틴 재즈 선율에 맞춰 “모두가 내게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나는 그저 자유롭고 싶을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될 수 없고, 자유로울 수도 없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 김남희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가득한 베이루트는 분명 중동에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맥도날드 옆으로 기타 모양을 한 하드락 카페의 간판이 보인다.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가득한 베이루트는 분명 중동에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맥도날드 옆으로 기타 모양을 한 하드락 카페의 간판이 보인다. ⓒ 김남희
베이루트는 여러 면에서 '중동의 원더랜드'처럼 여겨졌다. 바다와 산에서 넘실거리는 푸른 기운과 주황색 지붕을 인 돌집들로 다가오는 풍경이 우선 낯설었다.

거리에서 길을 물으면 "빠흘레 부 프항세?"(불어 할 줄 아세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겪은 이 나라는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불어와 아라빅을 섞어쓰고 있었다.

시내의 모스크에서는 기도시간을 알리는 뮈에젠의 소리가 하루 다섯번씩 들려왔는데, 나이트클럽은 테크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청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리아와 이집트, 요르단의 젊은이들은 이 나라로 일자리를 구하러 오고, 이 땅의 청년들은 유럽이나 미대륙으로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래서인지 레바논에 거주하는 레바논 인구는 겨우 450만인데, 해외 거주 레바논인이 천만이었다.

가슴확대수술과 얼굴 성형(이 나라는 여성의 성형 수술 빈도수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이었다)을 받았음에 틀림없는 외모의 여성이 민소매에 짧은 치마 차림으로 지나가고, 그 옆으로는 눈만 드러낸 검은 차도르의 여인이 걷고 있었다.

거리에는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KFC와 버거킹이 즐비했는데, 내가 만난 많은 이들이 미국에 대해 깊은 증오감을 드러냈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건물들로 복구된 중심가가 있는가 하면, 내전 중의 폭격에 부서진 건물들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기도 했다.

위태로운 조화와 충돌

베이루트 시내 중심가는 내전 후 새롭게 복구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시내만 놓고 본다면 파리보다도 더 어여쁘다는 자랑이 이해가 간다.
베이루트 시내 중심가는 내전 후 새롭게 복구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시내만 놓고 본다면 파리보다도 더 어여쁘다는 자랑이 이해가 간다. ⓒ 김남희
동서양의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기다리는 진정한 영웅은 누구일까?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
동서양의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기다리는 진정한 영웅은 누구일까?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 ⓒ 김남희
이 땅에는 천년도 넘게 이슬람과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그러나 2차 대전을 전후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친서구화 정책이 진행되고, 이스라엘 건국 후 팔레스타인 난민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온 나라가 기독교도와 무슬림으로 갈려 패싸움을 벌였다. 18년의 내전이 남긴 것은 폐허가 된 국토와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 박힌 적개심이었다.

그 사이 50 : 50에 이르던 기독교도 대 무슬림의 비율은 기독교도들의 해외이주로 30 : 70으로 변했다. 대통령은 기독교인, 수상은 순니파 무슬림, 국회의장은 시아파 무슬림 이런 식으로 권력 배분을 해왔지만 늘 옥신각신이었다. 요인 암살과 폭탄 테러의 위협도 여전하다. 기독교도들은 무슬림의 아랍민족주의를 부담스러워하고, 무슬림들은 기독교도의 친서구화 정책을 사대주의로 몰아붙였다.

옛 것과 새 것, 기독교적인 것과 이슬람적인 것,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마구 뒤섞여 위태로운 조화와 충돌을 거듭해 온 땅. 레바논은 그 아름다움 속에 상처로 가득한 과거와 불안정한 현재를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좌절 사이를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오가게 만드는 곳이었다.

인류가 이루어 놓은 것들 앞에서는 희망과 자부심이 일렁였고, 인간이 파괴해 놓은 것들 앞에 서면 절망과 한숨이 앞섰다. 레바논에 머무는 3주 내내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전쟁은 아직 '현재진행형'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자히르, 아이만, 아이만의 어머니와 아버지.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자히르, 아이만, 아이만의 어머니와 아버지. ⓒ 김남희
머물던 숙소의 주인 자히르와 함께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 사브라와 샤틸라를 찾은 날이었다.

이 캠프는 1982년 레바논의 친이스라엘파 대통령 바쉬르가 폭탄 테러로 사망한 후 이스라엘의 묵인 아래 기독교도 레바논 군사조직(팔랑지스트)의 보복 공격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테러리스트 수색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된 이틀간의 만행에서 그들은 2천명(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을 살해하고 강간했다.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그 사건은 결국 유엔의 평화유지군을 다시 레바논으로 불러들여 소득없는 주둔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캠프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사우리나! 사우리나!(사진)"를 외쳐대며 카메라 앞으로 몰려들었다. 거리의 어른들은 황톳물이 쏟아져 나오는 수도관을 가리키며 그 물을 먹고 살아야 하는 열악한 환경을 호소했다. 역사를 통해 충분히 겪었을 텐데도 여전히 외국인이 그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골목은 좁고 지저분했으며, 전선줄이 마구 엉킨 건물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다. 82년의 공격으로 부서진 건물들이 여기 저기 남아 있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거리에는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 정치·종교 지도자들의 사진과 포스터, 선동적인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곳에서 전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자히르의 친구인 아이만 집에서 차를 마실 때 아이만의 아버지(64)가 자리를 같이 했다. 1948년,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면죄부로 서구 세계가 이스라엘의 수립을 눈 감아 주던 그 해, 그는 여섯 살이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 모든 것을 잃고 고향을 떠날 때만 해도 그의 가족들은 곧 돌아가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5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레바논 내의 캠프를 전전하며 살아오는 동안 그는 같은 처지의 팔레스타인 여성과 결혼해 2남 6녀를 두고 손자까지 스물두명의 가족을 이루었다.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냐는 내 질문에 그는 "닥치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주름진 눈가의 웃음 속으로 눈물이 번지는 것 같았다. 나는 평생을 조국 없이, 집도 없이 떠돌며 살아온 한 남자의 절망과 분노를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올해 스물네살인 아이만은 거리에서 배웠다는 영어가 썩 훌륭했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직업도 없이 난민으로 살아야 하는 청춘의 무력감을 토로했다.

그들의 재산은 분노와 한숨

전선줄이 그대로 드러나는 캠프의 골목. 샤틸라 캠프.
전선줄이 그대로 드러나는 캠프의 골목. 샤틸라 캠프. ⓒ 김남희
다같이 팔레스타인 난민을 받아들인 시리아·요르단·레바논 중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의 삶이 가장 어렵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처음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났을 때 그들은 레바논에서도 동정적인 환영을 받았고 유엔이 운영하는 캠프에서 기본적인 주택을 제공받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존재는 결국 레바논 내의 아랍민족주의자들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해 친서구 마론파 기독교도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이주나 직업에 제한을 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또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정치적 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군 정보부대가 캠프 안에 세워지기도 했다. 시리아나 요르단과 달리 레바논은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아 그들은 이 사회에 편입될 수 없고, 영원히 난민일 수밖에 없었다. 35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 땅에서 어떠한 형태의 사회적 안전 보장도 없이 분노와 한숨을 재산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며칠 후, 남부 레바논을 둘러보는 길에 알 키암 캠프를 찾았다. 그 곳은 내전 때 친 이스라엘 기독교 레바논인 조직(South Lebanese Army)이 친팔레스타인 무슬림 레바논인들을 재판도 없이 가두고 고문하던 곳이었다.

2000년 5월, 마침내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에서 철수했을 때 동네사람들은 이곳 캠프로 몰려와 140명의 구금자들을 구출했다고 한다. 지금은 헤즈볼라가 관리하고 있는 곳으로, 그 곳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의 실제 전투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었다.

자히르와 헤즈볼라 이야기를 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무의식적으로 "그 테러단체?" 하고 되묻자 자히르가 정색을 하며 반박했다. "테러? 그게 누구의 입장인데? 우리 처지에서는 자위를 위한 조직일 뿐이야, 최대의 테러리스트 조직은 미국과 이스라엘 아니야?"라고 되묻는 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히르는 레바논 사람이었지만 무슬림이라 팔레스타인인들의 처지에 동정적이었다. 문득 일제시대 만주와 북간도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했을 우리 선조들이 떠올랐다. 안중근 의사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지도자를 살해한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차라리 이 땅에 발을 딛지 않았더라면...

공개사형장이었던 곳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들. 알 키암 구치소.
공개사형장이었던 곳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들. 알 키암 구치소. ⓒ 김남희
헤즈볼라가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에서 고문용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는 일본인 관광객들. 알 키암 구치소.
헤즈볼라가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에서 고문용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는 일본인 관광객들. 알 키암 구치소. ⓒ 김남희
수용소의 환경은 끔찍했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독방은 겨우 한 사람이 누우면 가득 차는 크기였다. 이 곳에서 목욕은 20일마다 찬물에 5분, 산책은 20일마다 10분이 허용되었다. 캠프의 한 귀퉁이에는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교수형에 처했던 현장이 설명문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 곳에서 무슬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공포와 분노가 함께 서린 얼굴들이었다. 캠프를 둘러보고 있을 때, 그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원망과 분노, 슬픔, 이런 기운들이 나를 짓눌러 오는 것 같아 뛰다시피 그 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레바논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문화유적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비극의 현대사 현장이 남겨준 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라 곳곳에 즐비한 로마 시대의 유적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어 괜스레 주눅이 들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경험에 기대어 세계를 인식해갈 수밖에 없는 걸까? 중동에 발을 딛기 전, 나는 이 땅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고, 무지했다. 차라리 이 땅에 발을 딛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몰랐더라면, 내 여행은 좀 더 편하고 즐겁지 않았을까? 세계의 한 편에서 아직도 자행되고 있는 탄압과 학살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여행자의 처지가 고통스러웠다.

시리아의 위대한 시인, 니자르 카비니가 1987년에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진행된 인티파다를 보며 쓴 시 '돌을 든 아이들에 관한 삼부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래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섬광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던 시인이 칼로 시를 써야만 하는 상황은 언제나 끝이 날 것인가.

정치적 이성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으므로 광기를 가르쳐 달라는 시인의 절규가 내 귓가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는 이 아이들도 결국엔 돌을 들고 거리로 나가게 될까. 샤틸라 캠프.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는 이 아이들도 결국엔 돌을 들고 거리로 나가게 될까. 샤틸라 캠프. ⓒ 김남희
돌을 든 아이들은
우리의 시험 답안지를 찢어버리고
우리의 승려복에 잉크를 퍼부으며
낡은 교과서의 진부함을 조롱했다.
중요한 것은
돌을 든 아이들이
수세기 동안의 목마름 끝에 우리에게 비를 가져다 주었고
수세기 동안의 암흑 끝에 우리에게 태양을 가져다 주었으며,
수세기 동안의 패배 끝에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맞서
저항했다는 것이며
아이들이 복종의 집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오, 가자의 아이들이여
우리의 방송에 신경 쓰지 말고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지어다
우리는 덧셈과 뺄셈의
차가운 계산만을 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말고 너희의 전쟁을 수행하라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고 무덤도 없는
눈 없는 고아들이다.

가자의 아이들이여
우리의 글에 대해 언급하지 마라
우리의 글을 읽지 마라
우리는 너희의 부모들이다
우리를 닮지 말아라.
우리는 너희의 우상이다.
우리를 숭배하지 말지어다.

오, 가자의 미친 사람들이여
미친 자에게 천 번을 경배하라
정치적 이성의 시대는
오래 전에 떠났다
그러니 우리에게 광기를 가르쳐다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