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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종교 건축물로 꼽히는 우마야드 사원.  살라딘의 무덤 뿐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의 창시자로 추대되는 이맘 후세인의 무덤도 있다. 또 세례 요한으로 주장되는 이의 목이 담긴 관도 있어 다양한 순례자를 끈다. 다마스커스.
시리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종교 건축물로 꼽히는 우마야드 사원. 살라딘의 무덤 뿐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의 창시자로 추대되는 이맘 후세인의 무덤도 있다. 또 세례 요한으로 주장되는 이의 목이 담긴 관도 있어 다양한 순례자를 끈다. 다마스커스. ⓒ 김남희
우마야드 사원의 살라딘 무덤. 오른쪽 나무관에 살라딘이 안치되어 있고, 왼쪽은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기증한 관이다. 생전의 검소했던 삶만큼이나 간소한 무덤이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무덤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한다. 다마스커스.
우마야드 사원의 살라딘 무덤. 오른쪽 나무관에 살라딘이 안치되어 있고, 왼쪽은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기증한 관이다. 생전의 검소했던 삶만큼이나 간소한 무덤이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무덤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한다. 다마스커스. ⓒ 김남희
쉬운 퀴즈로 중동 여행의 첫 글을 시작해보자. 제3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맞서 싸운 이슬람 세계의 영웅은?

빙고! 살라딘의 이름을, 정확히는 살라흐 앗딘의 이름을 망설임 없이 대답한 당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은 시리아. 북으로는 터키, 남으로는 요르단, 동과 서로는 이라크, 레바논과 등을 맞댄 나라이다. 부끄럽게도 이 땅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거의 유일한 지식은 살라딘뿐이었다. 다양하고 폭넓은 공부를 통해 체계적으로 학습된 지식과는 거리가 먼, 그저 소설책 한 권을 통해 얻은 짧은 상식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한 권의 책 또는 몇 줄의 글이 삶을 흔들기도 한다.

소설 <술탄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 영웅과의 첫 만남이었다. 살라딘은 내게 이슬람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의 열쇠를 건네준 이였고, 무지와 편견, 의혹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시리아에 들어선 이후 나는 그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책을 통해 익숙해진 지명 알레포, 라타키아, 다마스커스를 둘러보는 동안 살라딘은 천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말을 걸어왔다.

살라흐 앗 딘은 1138년 이라크의 티그리트 지방에서 태어난 쿠르드족 전사이다. 14세에 군대에 들어간 그는 곧 이집트,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며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십자군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전설처럼 승리했고,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에게 함락된 예루살렘을 88년 만에 재탈환했던 인물이다.

오랫동안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의 공통된 성지였다. 서기 1095년,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봉건 제후들에게는 영토와 전리품을 나눠주고, 사분오열하던 유럽을 통합하기 위해 십자군이 모집되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40일간의 포위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틀간 이어진 살육에서 남자, 여자, 아이를 가릴 것 없이 대다수 무슬림이 살해됐다. 유대인들은 도시를 방어하던 무슬림과 함께 싸웠지만, 십자군이 입성한 후 전체 유대인들이 예배당 주위에 모여 집단적으로 기도하라는 장로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십자군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예배당을 포위한 십자군들은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대인들이 불타 죽는 것을 꼼꼼히 확인했다. 서기 2000년, 로마의 교황은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과 만행을 사과했다. 꼭 9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천국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자비"

88년 만인 1187년에 예루살렘을 재탈환한 살라딘은 어땠을까? 유대인들은 예배당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국가 보조금을 받았고, 교회는 그대로 남았다. 복수를 위한 살인은 허용되지 않았고, 모든 신앙의 경배자들이 도시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기독교의 성묘를 파헤치자는 강경파의 주장에 살라딘은 "천국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자비"라고 맞섰다.

크락 데 슈발리에 - 이름 그대로 ‘기사들의 성’이다. 800년의 세월에도 그 풍채를 자랑하며 꿋꿋하게 서 있다. 홈즈의 군주에 의해 11세기에 세워졌으나 12세기 십자군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되었다. 십자군의 마지막 주둔지였던 이 성은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한다. 홈즈.
크락 데 슈발리에 - 이름 그대로 ‘기사들의 성’이다. 800년의 세월에도 그 풍채를 자랑하며 꿋꿋하게 서 있다. 홈즈의 군주에 의해 11세기에 세워졌으나 12세기 십자군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되었다. 십자군의 마지막 주둔지였던 이 성은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한다. 홈즈. ⓒ 김남희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예부터 교역로로 번성하고,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중요한 격전지였던 알레포 성. 다마스커스와 함께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시로 꼽히는 곳이다. 알레포.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예부터 교역로로 번성하고,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중요한 격전지였던 알레포 성. 다마스커스와 함께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시로 꼽히는 곳이다. 알레포. ⓒ 김남희
살라딘에 관한 몇 가지 일화를 더 들어보자. 그의 동정심과 관용은 상대편 적장에게도 이어져 야파 전투에서는 낙마해서 싸우는 리처드에게 말 두 마리를 보내기도 하고, 열병으로 앓아누운 리처드에게 과일과 눈(雪)을 보내기도 했다. 또 "어린아이들이 유혈에 익숙해지거나, 아직 무슬림과 이교도간의 차이를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기쁨을 느끼기를 원치 않는다"며 아이들에게 유혈장면을 못 보게 했다.

그는 생전에 어떤 종류의 사유재산도 지니지 않고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는 "재물 보기를 모래같이 하는 사람도 있다"며 부와 화려함을 경멸했다. 그가 죽었을 때는 개인 금고에 약간의 은 부스러기만 들어 있어 친척들은 장례비용을 꾸러 다녀야 했다. 지혜와 관용을 겸비한 진정한 기사이자 절제의 미덕까지 갖춘 왕이었다.

<로빈후드>나 <아이반호> 같은 중세 유럽의 신화와 소설 속에서 용감하고 낭만적이고 정의로운 기사의 전형으로 묘사된 사자왕 리처드는 어땠을까? 실망스럽게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크레를 함락시킨 후 전리품을 독점하고, 이집트 거상을 약탈하기 위해 십자군의 기수를 돌리고, 이교도는 여자나 아이들까지 무참하게 살해하는 식이었다.

1192년 리처드와 평화협정을 맺은 지 석 달 후 다마스커스에서 숨을 거둔 술탄 알라딘. 그의 죽음은 온 백성에 의해 진정으로 애도되었다. 그 후 예루살렘은 700년 간 이슬람 국가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 기간 동안 길 위에는 피 한 방울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유럽인의 머릿속에는 십자군 전쟁의 패배가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아 있었던 걸까? 살라딘이 죽고 700년을 훌쩍 넘긴 1920년 7월이었다. 오토만제국의 붕괴 이후 시리아가 프랑스에 할당되었고, 프랑스의 앙리 구로 장군은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 그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살라딘의 무덤을 찾는 일이었다. 부동자세로 선 앙리는 무덤 속 살라딘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살라딘이여, 우리는 돌아왔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이슬람 전체를 기독교가 지배한다는 의미다."

그 후 약간의 세월이 더 흘러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진정 십자군 전쟁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랍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미국이라는 교황청을 등에 업은 십자군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살라딘을 기다리고 있다. 분열된 아랍 세계를 재통일할 영웅을(사담 후세인은 걸프전 동안 자신이 살라딘과 같은 고향 티그리트 출신이라며 자신을 살라딘에 빗댔고,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장은 한때 '팔레스타인의 살라딘'이라 불리기도 했다).

분열된 아랍의 어느 쪽도 살라딘 같은 지도자를 갖지 못해 이 땅에선 아이들조차 피 냄새에 익숙하고, 종교근본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청춘들이 온몸에 다이너마이트를 감고 적진으로 돌진하는 행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후 햇살을 받은 살라딘 성은 평화롭기만 하다. 콸랏 살라딘. 알 하파.
끝나지 않은 전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후 햇살을 받은 살라딘 성은 평화롭기만 하다. 콸랏 살라딘. 알 하파. ⓒ 김남희
‘살라딘의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십자군이 바위를 깎아 인공 절벽으로 만들어 놓은 성의 입구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가운데 28미터 높이의 바위를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깎았다. 살라딘은 단지 이틀의 포위로 결국 성벽을 돌파했고, 그 후 이 성은 이슬람의 통치하에 남았다. 콸랏 살라딘. 알 하파.
‘살라딘의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십자군이 바위를 깎아 인공 절벽으로 만들어 놓은 성의 입구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가운데 28미터 높이의 바위를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깎았다. 살라딘은 단지 이틀의 포위로 결국 성벽을 돌파했고, 그 후 이 성은 이슬람의 통치하에 남았다. 콸랏 살라딘. 알 하파. ⓒ 김남희
중동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모든 중동 문제의 원인이 결국에는 한 국가의 수립이 갖는 태생적 부도덕에서 기인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배낭 속에 넣어 온 책을 열심히 읽으며,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가며 궁금증들을 풀어 가는 동안 내가 깨닫는 유일한 진리는, 지금껏 쌓아온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그 반대편의 세계가 만들어놓은 일방적인 시각이라는 점이다.

끝나지 않은 전쟁과 한숨 가득한 삶의 현장을 바라보며 십 년 전 여행했던 이스라엘이 떠올랐다. 그 땅의 공기는 무거웠고, 사람들의 표정은 얼어있었다. 한쪽이 누리고 있는 부와 다른 한쪽에게 남겨진 박탈과 가난. 양쪽 모두 총을 들고 있었지만 힘의 균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박해하는 쪽과 박해받는 쪽이 있었을 뿐. 그 땅에 머무는 내내 나는 불편했고, 불안했다.

그 땅에 평화가 깃들기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땅을 떠나던 날,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그런 생각이 드는 곳은 처음이었다. 여행했던 모든 곳이 내게는 다시 돌아오고픈 곳이었고, 나는 조건 없이 내가 발 딛고 선 땅과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그토록 엄청난 유적과 문화로 찬란한 그 땅에 나는 조금도 정들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내 다짐은 지금도 여전하다. 적어도 그 땅에 평화가 깃들기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내가 쓰는 돈의 대부분이 이스라엘 측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다시 지갑을 열고, 아직도 만연한 학살과 억압, 점점 뻔뻔스러워지는 탐욕의 손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

교황청이 그랬듯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만행을 사과하는 데 몇 백 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분노와 증오, 테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근본주의자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반대편 세계. 복수보다는 용서와 관용의 손을 내미는 살라딘이 다시 그 땅에 찾아올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어지러운 이 땅의 정세만큼이나 발걸음은 무겁고 머릿속은 복잡하다.

시리아와 레바논, 요르단을 거쳐 이집트로 넘어가는 여정 속에서 나는 무엇을 찾고, 보게 될까. 어쨌든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한 서적
술탄 살라딘 / 타리크 알리 / 미래 M&B
근본주의의 충돌 / 타리크 알리 / 미토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 제임스 레스턴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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