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혼자 떠나는 여행을 두려워하지 말자. 인생이 그렇듯 여행도 혼자 있어야 할 순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적절한 조화가 중요하다. 페트라. 요르단
혼자 떠나는 여행을 두려워하지 말자. 인생이 그렇듯 여행도 혼자 있어야 할 순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적절한 조화가 중요하다. 페트라. 요르단 ⓒ 김남희
곧 방학이 시작되면 배낭을 메고 쏟아져 나올 그대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 두 달간 그대들이 남긴 흔적을 들여다보며, 문득 그대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그대들은 여기저기에 정보를 남겨놓았더군요. 시리아 알레포의 스프링플라워 호텔, 하마의 리아드 호텔, 다마스쿠스의 알 하라메인, 레바논 베이루트의 탈랄 호텔, 요르단 암만의 클리프 호텔, 페트라의 발렌타인 호텔….

그대들은 작은 동네의 슈퍼마켓이 어디가 싸고 정직한지까지 지도로 그려놓았고, 때로는 길을 가는 이의 심정을 일기처럼 남겨놓기도 했더군요. 'Guest Book'이라 이름 붙은 그 노트들에 담긴 그대들의 꿈과 웃음, 외로움과 한숨을 들여다보는 일은 즐거움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전율하는 그대들이 어여뻤습니다. 더럽고 소란한 싸구려 숙소와 길거리 음식에 개의치 않고 나아가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습니다. 발 딛고 선 땅이 건네는 속삭임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열고 거리로 나가는 그대들의 열정과 호기심이 대견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아직 세상에 부대끼지 않아 때 묻지 않은 시선이 좋았습니다. 그런 모습은 지금부터 십 년도 훨씬 전, 처음 배낭을 메고 세상으로 나오던 때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때, 제 심장의 두근거림은 북소리처럼 울려댔고, 온 몸의 예민함은 우주의 가장 사소한 자극에도 반응할 수 있었고, 마음의 열림은 세상의 모든 바다를 품고도 남을 정도였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나의 귀는 어두워지고, 눈은 흐려지고, 촉수는 무디어 졌습니다.

길 위에서의 시간이 쌓여가는 동안 내가 살면서 구축해온 성을 부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성은 점점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저 성벽 사이로 한 줄 금이라도 가, 바람이 불어 올 틈이라도 생기기를 바랄 뿐…. 그래서 아직 젊어 성을 쌓기 이전이고, 쌓은 성도 무너뜨릴 수 있는 그대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자신만의 여행을 창조하라

그래요, 이 편지는 이제 점점 완고해져가는 한 여행자가 아직 꽃잎처럼 부드러운 심장의 소유자인 젊은 그대들에게 쓰는 당부의 편지입니다. 그러니 마땅치 않은 구석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그대들은 가끔 저를 안타깝게도 했습니다. 한두 푼에 울고 웃고, 작은 것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부분을 전체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더군요. 어디서나 한국인끼리 몰려다니고,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하려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공부하고 사색하는 모습은 부족한 대신, 빡빡한 일정에 쫓겨 늘 급해보였습니다.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여정에는 뜻밖의 만남이 선물처럼 찾아올 여유가 없습니다. 설혹 찾아온다 해도 놓치기 쉽겠지요. 여행에서의 획일성을 벗어나라고, 그대만의 여행을 창조하라고 속삭여주고 싶었습니다. 숱한 유적과 박물관, 유명한 관광지들을 사전 지식도 없이 찾아가 그저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식의 여행은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건 그대의 성을 뒤흔들고, 그대의 신념과 상식을 깨고, 그대의 심장을 녹이는 한 번의 만남인 거지, '찍고 도는'식의 관광이 아닙니다. 여행은 경쟁도 아니고, 증명사진을 찍어 싸이월드에 올리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대의 영혼 속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았던 현을 흔드는 만남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 경험에서 이야기한다면, 그런 만남은 혼자 있을 때 찾아옵니다.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그대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럴 때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외로움은 인간이 지고가야 하는 숙명과 같은 거라고.

외로웠기 때문에 예민하게 깨어 있었고, 혼자였기 때문에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흔들렸기 때문에 더 단단한 나를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구 위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외로움 속에서 쩔쩔매본 사람이 연대의 손길을 내밀 줄 알고, 곁에 있는 이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두려워 말고, 혼자 낯선 세상 속으로 떠나라

낯선 문을 열면 내 앞에 펼쳐질 세상과 편견 없이 만나는 것. 영혼을 흔드는 단 한 번의 만남이 있다면 여행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 비블로스. 레바논
낯선 문을 열면 내 앞에 펼쳐질 세상과 편견 없이 만나는 것. 영혼을 흔드는 단 한 번의 만남이 있다면 여행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 비블로스. 레바논 ⓒ 김남희
혼자일 때 우리는 어떤 장애나 가면 없이 자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 결국 길 위에서 낯설고 익숙한 것들을 통해 우리가 들여다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삶은 너무나 많은 관계 속에서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혼자 낯선 세상 속으로 떠나길 바랍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을 끊임없이 겪어가며 그대들은 단련될 것입니다. 혼자 있어야 할 순간과 함께 있어 즐거운 순간을 적절히 섞어내는 중용의 기술을 만들어 가기 바랍니다.

일이백 원에 화내고 웃는 그대들의 모습도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중동에서 한국인들은 짠돌이, 짠순이의 이미지로 굳어가고 있더군요. 저 역시 부당한 요금과 사기에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은 어쩌면 한국인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것인지, 저도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잘 웃지 않는 한국인, 사소한 일에 화내는 한국인, 한 가지 일로 열 가지를 해석하는 한국인의 이미지를 남겨주지는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대들이 가진 가장 큰 재산은 미소입니다. 웃음은 상황을 바꾸고, 상대의 마음을 열고, 그대가 이기게 만드는 마법의 열쇠입니다. 게다가 돈도 들지 않습니다. 그대들의 어여쁜 미소를 아끼지 마세요.

'미들 이스트'에는 예수가 남긴 흔적을 좇는 젊은 그대들의 발길이 잦았습니다. 그대들이 요르단 다나의 게스트하우스 벽에 남긴 글을 보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슬람은 무너질 것이다." 이런 글은 제 가슴을 먼저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어째서 아직 젊은 그대들이 그토록 완고한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져 있는지, 왜 지구상 13억 인구가 믿고 있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대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에도 여러 얼굴이 있다는 것을,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고 유일한 구원이라는 믿음은 이제 북미와 한국 같은 몇 몇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근본주의적 사고임을, 그대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대들이 예수의 흔적만 좇았지 예수의 삶을 따르지 않는 빈한한 영혼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 나와 다른 믿음, 내가 자란 곳과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배낭을 메고 나온 게 아닌가요? 젊은 그대들이 다양성을 배척한다면, 다음 세대에도 평화와 공존은 멀기만 할 것입니다. 그대들의 열린 사고가 우리 사회의 희망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길 위에서 마주칠, 그대들의 싱그러운 웃음을 기다리며

젊은 여행자들이 여주인과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동을 여행하다 보면 거리에서, 버스에서, 식당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에게 초대를 받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일상적 경험이 된다. 알 하페. 시리아
젊은 여행자들이 여주인과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동을 여행하다 보면 거리에서, 버스에서, 식당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에게 초대를 받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일상적 경험이 된다. 알 하페. 시리아 ⓒ 김남희
혼자 여행하는 여성 여행자들이 짜증스레 뱉어놓는 이 땅의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들. 그것만으로 천일야화를 엮어내고도 남음을 저도 잘 알고 있지요. 저 역시 이슬람 국가에서 몇 번의 성희롱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땅을,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불쾌한 경험들을 잊게 해주는 이슬람 국가만의 호의와 환대, 친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손님은 알라가 보낸 선물'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 두 번의 불쾌한 경험으로 전체를 판단하지 말기를, 사소한 일들이 그대의 여정을 장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부 종교근본주의자들의 격리정책과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환경에 그 원인을 돌리며 여행을 계속하다보면 불쾌함을 잊게 하는 조건 없는 환대와 친절을 되돌려주는 곳이 이 땅이니까요.

말이 길었습니다. 그대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기에는 저는 사랑에 관해서도, 여행에 관해서도, 삶 그 자체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 위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고단하고 외로운 여정에서 찾아내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아는 선배여행자로서, 그저 몇 마디의 말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결국 이 길고 두서없는 편지는 저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한 셈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여행처럼 그대들의 여행 역시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라는 것을. 돌아와 그대들이 서야 하는 자리에서의 일상을 건강하게 꾸려가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게 보기 위해 떠나는 것임을.

길 위에서 마주치게 될 젊은 그대들의 싱그러운 웃음을 기다려봅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먼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06년 6월 12일 이집트 다합에서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