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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은 9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사실상 조건없는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 연합뉴스 백승렬
이번에도 사건의 발단은 '공포의 동포간담회'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동행취재하는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동포간담회가 '공포간담회'로 불린 지 오래다. 노 대통령의 외국 순방길에 약방의 감초처럼 끼는 현지동포 간담회에서 메가톤급 뉴스가 터져 나오기 일쑤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된 '북에 대한 많은 양보 및 전제조건 없는정상회담' 발언도 몽골을 국빈 방문중인 노 대통령이 9일 오후 울란바토르 시내 한 음식점에서 가진 동포간담회에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잘 설득해 한국에서 기차에 자동차를 실으면 북한을 거처 울란바토르, 유럽으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한 교민의 건의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정교하게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른 계산된 발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울란바토르 발언'이 나오자마자 몽골 현지와 한국 양쪽에서 청와대와 정부관계자들이 '불끄기'에 바쁜 모습을 보인 것이 이를 반증한다.

"북에 많은 양보" 정교히 계산된 발언 아닌 듯

송민순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은 9일 현지에서 노 대통령 발언 직후 기자들이 큰 관심을 보이자 "예전부터 해 왔던 말씀"이라며 "특별히 의미를 두고 말한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서둘러 진화를 시도했다. 이종석 통일부장관도 10일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기존에 제안한 대규모 전력지원 이상의) 대북 중대제안 같은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장관은 이어 "대통령 말씀은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 공동번영을 위해 틀을 좀 크게 보고 적극적으로 상황을 변화시켜 나가자는 의지의 표현"이라며 "너무 추론을 하거나 비약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문했다.

참모들의 이런 해명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동포간담회 발언은 기왕의 다른 동포간담회에서처럼 이번에도 전혀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독일 순방 때도 그랬다. 당시는 답보상태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돌파구를 위해서라도 남북관계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구나 노 대통령이 방문한 베를린은 지난 2000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문을 기점으로 그해 남북 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진 '베를린 선언'이 발표된 역사적인 장소였다.

또 노 대통령은 이미 베를린 방문 한 달 전에 가진 공군사관학교 임관식에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며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일이다"고 못을 박아 '동북아균형자 역할'을 강조한 터였다. 당연히 순방을 동행취재한 기자들은 남북관계에 대한 중대한 메시지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잔뜩 긴장했다.

2004년 베를린에선 "남북 관계서도 쓴소리 하고 얼굴 붉힐 땐 붉혀야"

▲ 지난 2005년 4월 11일 독일을 국빈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동포간담회에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남북관계에서도 쓴소리를 하고 얼굴 붉힐 때는 붉혀야 하고, 이웃과도 쓴소리 하고 붉힐 때는 붉혀야 한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 연합뉴스 김동진
그러나 노 대통령은 독일 방문 첫날 가진 베를린 동포간담회에서 "남북한 평화선언을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뜻밖에도 "남북 관계에서도 쓴소리를 하고 얼굴을 붉힐 때는 붉혀야 한다"면서 비료 이야기를 꺼냈다. '비료를 지원받으려면 대화 테이블에 나와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발언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중국과 베트남의 예를 들어 북한의 변화방향을 언급하는 등 체제 문제까지 언급했다.

그동안 미국과 일본을 향해 북한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온 데 견줘보면,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당연히 언론에선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강경 쪽으로 선회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기자는 4월 11일 당시 베를린 현지에서 청와대 고위 관계자에게 발언 배경에 대한 후속취재를 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베를린 동포간담회에서 대통령께서 비료 이야기를 꺼낸 것은 뜻밖이었다.
"질문(편집자주 : 남북한의 '평화선언'을 건의한 질문) 자체가 너무 앞서간 것이어서 (지금 남북한이 신뢰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선언을 할 수 없는 배경에 대해) 답변하느라 그런 것이지 북한에 어떤 메시지를 건네려고 얘기한 것이 아니다."

- 그러나 '베를린 선언'을 할 것이라는 일부 언론 보도도 있고 해서, 북한으로서는 뭔가 기대했을 것인데 대통령이 직접 비료(비료 지원받으려면 대화 테이블에 나와라) 얘기까지 꺼내는 바람에 더 실망한 것 아닌가.
"우리가 그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 그런데 북한도 비료 파종 시기를 놓친 것 아니냐.
"그렇게 되었다. 그렇지만 (북한이) 급하면 급한 대로 나와야지 말이야. 대화의 규칙을 안지키니까, 그래서 그런 것이다.

- 그러면 노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이제 더 이상 선언이나 발언은 안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되나.
"그렇다. 안하실 것이다. 뭔가 가능성이 있어야 얘기하지 (반응이 없는데) 맨날 벽에 대고 얘기할 수 없지 않느냐. 김대중 대통령 하실 때는 ('베를린 선언'을 할) 여러 가지 여건이 되었지만…(지금은 그런 선언을 할 여건이 안된다)."

얼굴 붉힐 상대 '미국→북한→미국'으로 변화

이 고위관계자의 해명대로 노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얼굴 붉힐 쓴소리'는 대북정책의 기조가 바뀌었거나 사전에 준비한 대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더 이상의 '쓴소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북정책 기조의 변화를 알리는 메시지가 아니라면 오히려 그 발언은 굳이 베를린 같은 통일의 상징성이 큰 장소에서 하지 않아도 되는 발언이다. 그것은 정부가 취해온 일관된 대북 메시지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얼굴을 붉혀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그 전에도 있었다. 문제는 그때는 이때와는 정반대로 얼굴을 붉힐 상대가 '북한'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이었다는 점이다. 불과 베를린 발언 4개월 전의 일이다. 역시 '동포간담회'에서였다. 결국 '그때그때 달라요'다.

▲(북한) 붕괴를 원치 않는 중국과 한국과, '레짐 체인지'(정권교체)를 해야 된다고 하는 나라들하고의 사이에서는 손발이 안 맞게 돼 있다.
▲미국과 일부 서구 국가들에서 북한의 체제가 결국 무너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더 불안해하고 위기감을 느끼는 거다.
▲북핵 문제는 한국 국민의 평화와 안전, 미래까지 내다보면서 그렇게 풀어야 한다. 그걸 위해 혹 누구랑 얼굴을 붉혀야 한다면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우리의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4년 12월 6일 프랑스 파리 동포간담회)


일부 국내 언론들은 이에 대해 대북정책과 협상에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부적절한 언사라고 비판했다. 또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은 탓에 외교부는 언론이나 관련국들에 발언의 취지를 해명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처럼 논란이 된 노대통령의 북핵관련 발언은 참모들이 사전에 준비한 연설문에 따른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해외 방문지에서 동포들을 상대로 한 간담회에서 즉석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동포간담회는 청와대 출입기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외교부 등 관계부처에서도 '공포간담회'로 통했다.

같은 날 강금실은 DJ 찾아가고, 이종석 개성공단을 찾다

▲ 개성공단을 방문한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9일 오전 (주)삼덕통상 신발공장에서 북한 근로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진성철
노 대통령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정상회담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에 유효하지 않으면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언제 어디서 무슨 내용을 얘기해도 좋으니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수십 번 얘기했다"고 말해 북핵 해결이라는 '전제조건'을 없앴다. 원칙의 부재이다.

"미국과 주변국들과의 관계 때문에 정부가 선뜻 할 수 없는 일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길을 잘 열어주면 저도 슬그머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급도 그동안 표방해온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부는 DJ 방북은 '개인 차원'이라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정부 특사'로 간주한다는 얘기였다. 가뜩이나 DJ의 방북을 놓고 야당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마당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런 언급을 하니 우리 국민은 물론 북한도 헷갈릴 지경이다.

중대한 대북정책의 변화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면 정제된 표현과 분명한 신호를 보내는 것 못지 않게 '택일'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많은 양보' 발언을 한 날짜도 좋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정상회담을 구걸하는 선거용 북풍(北風) 유도 발언'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하필이면 노 대통령이 '많은 양보' 발언을 한 9일에 국내에서는 정부·여당 인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방문하거나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의 상징적 성과물인 '개성공단'을 적극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의 '많은 양보' 발언은 강금실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가 김 전 대통령을 방문한 날에 나왔다. 또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8일 김 전 대통령을 방문한 데 이어 9일에는 광주에서 '꼭지점 댄스'를 췄다. 김 전 대통령과 별다른 '인연'이 없는 강 전 장관의 동교동 방문은 전통적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이른바 '집토끼 잡기 전략'으로 풀이된다.

공교롭게도 9일 이종석 통일부장관이 장관 취임후 처음으로 개성공단을 방문해 "어떤 한반도 정세변화가 있더라도 남과 북이 개성공단사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고 강조한 것도 '상승효과'를 불러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통령의 '메시지 관리'가 중요한 때

현재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에 발목이 잡힌 6자회담 무용론까지 나오는 가운데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북핵문제 해결의 유일한 '통로'로 간주된 북핵 6자회담은 미국의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 관련 대북 금융제재와 탈북자 문제 직접 개입을 통한 대북 인권 압박 그리고 그에 대한 북한의 반발 등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2000년 6·15 공동선언 같은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지렛대와 동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같은 시점과 배경를 감안하면 노 대통령의 울란바토르 발언은 6월에 예정된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적극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다행스러운 일은 노 대통령의 '힘 실어주기' 발언 직후에 열린 제12차 남북 철도도로연결 실무접촉에서 오는 25일 경의선과 동해선 남북철도를 시험운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경의선 철도를 통해 이뤄질 가능성이 한층 더 커졌다.

그럼에도 울란바토르 발언이 '힘 실어주기'를 넘어 현재의 북핵 교착을 푸는 '승부수'라면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 참모들과의 조율을 거치지 않은 '즉석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즉석 발언'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기보다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냉·온탕을 오간 대북정책처럼 혼란을 자초할 뿐이다.

노 대통령의 인식대로 현재의 북핵 상황은 중대 국면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그것을 대통령만큼 체감하지는 못한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우선 정부가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간 시각차를 솔직히 드러내놓고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위기일수록 대통령의 '메시지 관리'가 중요한 때이다. 대법원의 판결이 최후의 심판이듯이, 대통령의 외교안보 발언은 총성없는 외교전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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