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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구십일세의 허영재 순천향교 승평음사장, 붓으로 직접 쓴 한시백일장을 알리는 프랑카드에서 시작을 알린다.
ⓒ 서정일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다. 그리고 40여명의 유생들, 조용히 마루에 앉아 눈을 감는다. 한시를 적어낼 종이가 무릎 앞에 놓일 때 비로소 눈을 뜨고 펜촉 모양의 첨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올해 91세의 허영재 순천향교 승평음사장, 객사에 올라 한시 백일장의 시작을 알린다.

해방 후부터 1년에 두 번 꾸준하게 행사를 진행해 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과 여름사이에서 열리는 낙안읍성축제에 맞춰 한시 짓기 자웅을 겨룬다. 장원을 한다고 소 한 마리를 타는 힘자랑이 아니다. 조용한 가운데 시를 읊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한시백일장이다. 타인의 시구에 때론 감탄하면서 넌지시 자신의 글귀도 되돌아보는 뜻 깊은 자리.

▲ 유생들은 붓을 들고 한시간 가량 엎드려 글자 하나 하나에도 정성을 다한다
ⓒ 서정일
"한시의 멋스러움을 잊지 않기 위해 행사를 합니다."

허영재 승평음사장은 한시가 주는 아름다움도 전통의 멋이라 얘기한다. 하지만 우리들 곁에서 차츰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아쉬워하는 듯 헛기침으로 대신한다. 작은 그들만의 행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치러온 의미 있는 행사임을 새삼 느끼는 것은 요즘 다시 떠오르는 한자의 유용함 때문이다.

'전춘(餞春)'

3열로 객사 대청마루에 앉아 시제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던 유생들, 봄을 떠나보낸다는 뜻의 전춘이라는 시제를 내려받고 다시 한 번 봄을 생각한다. 파릇파릇 새싹을 돋게 하는 왕성한 생명력, 울긋불긋 꽃으로 수를 놓는 아름다움. 그런 봄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을 그들은 어떻게 시로 승화시킬까?

엎드려 붓을 놀리길 한 시간, 때론 먼 산을 바라보지만 그건 휴식이 아니다. 어젯밤 예상 시제를 갖고 그토록 고민했건만 한 글자를 풀어내면 또 한 글자가 꼬인다. 붓 가는 대로 써 내려가는 유생의 손놀림이 부러운지 고개는 자꾸만 옆으로 돌아간다.

해가 객사 처마 밑으로 파고들 때 모두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규정된 시간이 모두 끝났기 때문이다. 하얀 백지가 까만 먹물로 채워지고 부시관은 채점에 들어간다.

▲ 행사에 파견온 순천시청 문화재과 정은경씨, 유생들의 의복을 꼼꼼히 챙겨주고 있다
ⓒ 서정일
"할아버지 잘 쓰셨어요?"

순천시청 문화재 과에 근무하는 정은경씨, 그들의 의복을 가지런히 챙긴다. 행사에 파견되어 꼼꼼히 챙기느라 진땀을 흘리면서도 미소는 잃지 않는다. 그렇게 의복을 갈아입으니 조금 전의 근엄함(?)이 아니다 여느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정겹다. 그 정겨움 때문일까? 정씨는 "모두 장원이세요"라고 속삭이듯 말하는데 유생들은 그저 먼 산만 쳐다본다.

덧붙이는 글 | 낙안읍성 축제 (5/4-5/8)
http://www.nag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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