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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이란 주민들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함께 수행한 성곽이다. 고려말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안과 가까운 곳에 축조하기 시작했고 조선초기에 본격적인 축조가 이뤄진다. 읍성을 쌓게 된 근본 목적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김빈길, 낙안 태생으로 의병을 모아 수만의 왜구를 무찌르고 처음으로 낙안읍성을 토성으로 쌓은 인물. 전북 사진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여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혜다.

1983년 6월 14일 국가사적 제302호로 지정되면서 개발된 낙안읍성 민속마을, 지금은 관광지화되어 마을 구석구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때론 한가하면서도 평온한 모습이지만 당시 낙안읍성은 긴박한 순간에 혈전을 준비하는 마을사람들과 죽음을 각오한 용맹스런 김빈길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낙안읍성과 김빈길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지금 낙안읍성엔 그 어느 곳에도 김빈길 장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 도대체 이곳 낙안땅에 토성을 축조하고 왜구로부터 목숨 걸고 마을 주민을 지킨 김빈길은 어디에 있다는 걸까?

김빈길에 관해 물어보니 동네 주민들은 임경업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를 가리킨다. 의아했다. 왜 남의 사당에 모셔진 걸까? 물어 물어 찾아간 그곳에서 정면이 아닌 한쪽 구석으로 초라하게 모셔진 김빈길의 영정과 위패를 발견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한쪽 구석에서 남의집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충민사 한구석에 초라하게 모셔진 김빈길 장군의 영정
ⓒ 서정일
"아니지, 김빈길 장군의 사당도 있었어. 삼현사라고 하는데 한일합방 때 일본사람들이 폐쇄해 버렸지. 김빈길 장군 하면 왜적을 수도 없이 많이 무찔렀잖아. 그래서 사당을 못쓰게 폐쇄했다는 얘기가 있어."

기자의 질문에 답답함을 호소라도 하듯 힘주어 말하는 낙안향교 사무국장 문진한(80)씨. 김빈길 장군 영정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는 문씨의 말에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시대에 맞게 제 멋대로 해석된다고는 하지만 낙안읍성을 쌓은 인물이며 왜적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워 향토를 지킨 한 위대한 인물이 이렇듯 초라하게 남의 사당 한 구석에서 자신의 피와 땀의 결실인 낙안읍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특별한 계획은 아직 없다'는 관련 부서의 말이 더 더욱 가슴아프게 한다.

바로 세워지지 않는 역사는 한 세대 한 세대가 지날수록 더 더욱 왜곡되어지는 법, 더 늦기 전에 김빈길 장군에 관한 재평가와 함께 그가 쌓은 낙안읍성 안으로 위패와 영정이 모셔지길 기대해 본다. 되돌아 본 김빈길 그리고 낙안읍성, 자연마저 서글펐는지 남문 옆 대나무숲엔 곧게 자라야 할 대나무 하나가 휘어져 흐느끼고 있었다.

▲ 서글픔인지 곧게 자라야 할 대나무가 휘어져 흐느끼고 있다.
ⓒ 서정일


<낙안민속마을의 사계>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가 없는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조상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민속촌은 그나마 우리가 느껴볼 수 있는 유일한 과거. 하지만 살아 숨쉬는 민속촌다운 민속촌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남 순천 낙안민속마을, 관아를 중심으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성안에는 아직도 250여명의 사람들이 '과거 속의 현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사계는 또 어떻게 변모하고 있을까?

탄생이 있을 것이다. 새 보금자리를 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삶이다. 하지만 여느 삶과 다른 그들의 삶과 죽음은 우리의 과거 속의 모습과 좀 더 닮았으리라.

이런 모습들을 글과 사진으로 담아내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일임엔 틀림없다.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정신이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대하며, 연재를 시작한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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