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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랑가족>,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낸 작가 공선옥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유랑 작가’ 공선옥(42)은 또 다시 이동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비바람 막아주는 천막도 걷었고, 살림살이도 대충 싸놓았다. 이동하는 날로 잡은 25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전세 값’에 마련했다지만 이자 막느라 고달팠던 그녀의 강원도 춘천의 천막이 새로 터 잡을 곳은 전북 전주란다. 임시정착지(?)를 그곳으로 정한 것은 가족들에게 먹일 양식을 쉽고 편안하게 벌 수 있어서라기보다 둘째딸의 협박(?)에 못 이겨서란다. 전주에서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그녀의 둘째딸은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마쳐야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그녀는 맹자의 어머니가 되기로 했단다.

그런 그녀는 최근에 창작집과 산문집을 동시에 상재했다. <유랑 가족>(실천문학사)과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당대)가 그것이다. 문단에 얼굴 내미는 일을 좀처럼 하지 않는 그녀가 책 출간을 계기로 어려운 서울나들이를 했다. 막내아들이 엄마 언제 오느냐고 전화로 채근할 때가 됐다는, 그녀의 발길을 붙잡았다.

영세민의 ‘부끄러운 일기장’

그녀와의 만남은 앞선 약속이 끝나지 않아 애초 인터뷰 장소로 예정됐던 서울 마포 연남동의 당대출판사에서 인사동으로 급히 옮겨 시작됐다. 자신이 왕팬임을 자처하는 어떤 유명인사(?)에게 그냥 뵙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가 의외의 우울한 소식을 주고받는 긴 통화가 끝난 다음이었다.

“솔직히 환멸스럽습니다. 이게 다 제가 먹고 산 흔적들이니까. 책 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번에도 부끄럽습니다. 소설가가 소설보다 잡문으로 먹고 산 흔적이니까 살아보겠다는 영세민의 ‘부끄러운 일기장’이나 다름없죠.”

전화로 인해 우울해진 그녀의 기분을 돌려보려고 그녀의 책에 대한 신문들의 소개 기사가 “소설 얘기는 대문짝만하게 쓰면서도 산문집에 대해서는 선심 쓰듯 맨 끝에 한 줄로 언급했던데, 왜 그렇게들 산문집을 홀대하는지 모르겠다”고 눙치며 물었더니, 이렇게 꿀꿀한 대답이다.

이번에 낸 산문집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에서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꼽는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꼭지는 맨 마지막에 나오는 ‘평안도 시인의 시를 읽는 밤’이였단다. 이유는 “꼭 너를 보는 것 같아”서란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이렇게 전개되는 평안도 시인의 시 구절 아래 그녀는 “어느 사이에 나는 남편도 없고 또 남편과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는 세상 떠난 지 오래며 형제들과도 멀리 떨어져 지금, 강원도 춘천에 와 있게 되었다”고 썼다. 이어지는 감상은 영락없이 그녀의 자전적 진술이다.

가난한 사람도 지켜져야 할 품위가 있다!

▲ <유랑가족>,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낸 작가 공선옥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녀는 여느 작가들과 달라 보였다. 작가 하면 으레 연상되는 ‘고상한 그 무엇’이 아니라 치열하게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밥’의 의미가 남달랐다.

“아무리 고상한 인간이라 해도 누구나 태어나서 먹고 살기 위해 투쟁을 하지 않습니까. 삶 자체가 밥과의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선옥 소설의 ‘씨앗불’이라 할 수 있는 산문집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키워드는 ‘추천사’를 쓴 언론인 손석춘의 말처럼 “백죄 그라믄 쓰간디요”가 아닐까 한다. 산문집에서 직접 인용해 그 말뜻을 알아보자.

“고향에서 잘 쓰던 말이다. 백주 대낮에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인두겁을 쓰고서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뜻이다. 그 ‘백죄’ 안 되는 일들을 때로는 겪기도 하고 때로는 보기고 하고 때로는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하기도 하면서 살았던 것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사는 인생들아, 설워 말아라. 나는 노래 부른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인생들아, 슬퍼 말아라.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백죄 그러지 말아라. 사는 것이 사는 사람들아, 입 좀 닥쳐라.”(산문집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19~20쪽)

그렇다. 인두겁을 쓰고 “백죄 그라믄 쓰간디.” 하지만 세상은 그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지문인식기가 뭡니까. 대한민국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됩니까. 인간들이 웃깁니다. 급식비 안낸 아이들 명단을 공개하고, 졸업장 안주고, 노숙자가 앉을까봐 쇠칼구리를 설치하고…… 그 따위로 추잡하게 살아서 뭐합니까.”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적 품위마저 허용되지 않는 이 사회에 대해 실망한 눈치다. 혹여 ‘품위’라는 낱말에 사치를 떠올리지는 말길 바란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품위는 있기 때문이다.

“나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동냥치가 오면 먹던 밥상에 숟가락 하나 놓게 하여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품위는 돈으로만 지켜지는 게 아닌데, 어떡하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서 사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람한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고 강조했다.

“살인을 저지르고, 오리발 내밀고 호의호식 하던 부도덕한 정권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라고 봅니다. 위층이 개판인데 아래층이 개판이 안 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죠.”

그래서 그녀는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인간들을 사회지도층으로 모시고(?) 사는 현실이 서글프다며 이 땅에 지식인은 많을지라도 양심적 지성인이 부족함을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정신적으로 이미 거덜 났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들 위해 부정 저지르는 대학교수, 김민수 교수 임용을 반대한 서울대 교수들, 사립학교법 통과되면 학교 문 닫겠다고 위협하는 교육자들…. 이들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는 것이 싫다고 그녀는 말했다.

배운 사람이 철저하게 절망해야 희망이 있다!

▲ <유랑가족>,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낸 작가 공선옥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소설집 <유랑 가족>에서 그녀는 아프고도 핍진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놓으면서도 세상을 품는 어미의 손길로 우리네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준다. “단 한 줄의 거창한 문장조차” 구사하지 않은 그녀는 “세상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품어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관념덩어리처럼 되어버린 오늘의 소설들이 쉽게 내던져버린 현실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는” 예술가였다.

그녀에게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시대적 역할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예술가’라는 표현에 손사래부터 쳤다.

“예술가라는 표현은 제게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색하고 낯선 이름입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허덕이는 작가입니다. 글 쓰는 노동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치열하게 살다보면 자신의 작업이 예술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해맑고 아름답게 늙은 노인의 모습처럼. 그녀는 사과궤짝이나 스티로폼 상자에 고추 심고, 꽃 심고, 상추 심으며 사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평화를 갈구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그 사과궤짝의 평화마저 깨버린다.

“옛날에는 가난해도 자살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로 기댄 가난을 깬 것이 근대화인데, 지금은 고착화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서로 부조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철학이 필요합니다.”

가난과 빈곤. 그 글자의 다름만큼이나 의미의 차이도 크다. 그래도 인간적인 가난에 비해 개별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빈곤에서는 눈곱만큼의 인간미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가난마저 허용하지 않는 빈곤의 사회다.

그래서 그녀는 배운 사람이 철저하게 절망해야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살만하다는 값싼 희망은 말하지 말기로 합시다. 처절하게 절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관심은 폭력입니다.”

가진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고 우울증에 빠지지 않아 문제라고 말하는 그녀는 왜 사느냐고 물었더니 원고 써서 버는 벌이가 미싱 타는 것보다 낫더라고 동문서답하면서 막내아들이 기다리는 춘천으로 서둘러 떠났다.

작가로서 공선옥의 삶은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고 한, 작가이자 사회활동가인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진술을 덧붙이면서 만남을 갈무리한다.

“작가가, 예술가가 해야 할 일 중에는 풍경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기록하는 일도 포함된다. 어떻게? 한없이 정직하게. 자기가 사는 시대에, 그 시대의 상처에 한없이 정직하게…….”

소설 쓰는 비정규직 노동자, 공선옥

공선옥은 1963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소위 대처인 ‘광주’로 나왔다. 열여덟 여고생으로 겪은 ‘80년 5월 광주’는 그녀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대학에 들어갔으나 이러저런 이유로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다 ‘미싱 타는 아줌마’로 있던 그녀가 작가가 된 것은 1990년 중편 <씨앗불>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면서부터다.

아이 데리고 공장 다니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볼 겸 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그냥 끼적거려 놓았었는데, 그게 ‘60만원’짜리 밥이 되었다.

당시 그녀가 미싱을 타서 받았던 한 달 벌이가 13만원이었는데, 소설 한 편으로 받은 원고료 60만원은 열 달 동안 방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거금이었다.

때마침 건강이 더 이상 공장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선택의 여지없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따로 문학수업을 받지 않았던 그녀에게 있어 문학 스승은 그녀 자신이다. 아이들이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다.

그동안 그녀는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등의 소설집과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수수밭으로 오세요> <붉은 포대기> 등의 장편소설,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마흔에 길을 나서다> 등의 산문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 조성일 기자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당대(2005)


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실천문학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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