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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동안 꾸물거리던 안개가 그치면서 주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운 장식 기둥을 감싸고, 전면에 5개의 발톱을 허공에 뻗고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힘찬 두 마리의 용의 모습. 조각된 수많은 용들이 정교한 조각병풍에 금빛으로 조각되어 있는 게 보였다. 주위는 그야말로 화려한 건물 일색이었다. 여기는 심양의 고궁.

심양고궁은 청왕조의 시조인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황태극이 군림했던 기간에 지어졌다. 여기는 청세조 복림이 태어나 여섯 살에 황제가 되어 이듬해 북경으로 천도하기까지 황실의 주거지였으며, 정치의 중심지였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고궁의 모습은 건륭황제 때 증개축 된 것이다.

무더운 여름인데다 장마기간이라 고궁에는 관람객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주로 한국과 일본에서 오는 단체관광객도 보이지 않았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찾아온 노인의 모습만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고궁 안에는 주황색 바지와 조끼를 입은 인부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여기 심양 고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지정되면서 대대적인 보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가 좀 어수선하였지만, 북경의 자금성에 비해 아담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고, 지붕마다 청색의 테두리와 단청을 많이 한 것이 이색적이었다.

채유정은 그러한 고궁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주위의 구석진 곳을 유심히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몽고 용사 자기상의 내부와 황제가 탔던 가마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지금 안 박사가 죽기 전에 남겼을 유물을 찾고 있는 것이다.

평소 안 박사는 유적을 탐사하는 것 외에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유적지와 자신의 집만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런 안 박사가 유일하게 찾았던 곳이 바로 여기 심양 고궁이었다. 그는 유적 답사가 잘 되지 않을 때나 어떤 실마리를 얻고자 할 때마다 이곳을 자주 찾아왔다. 와서는 누각이나 노송 아래 벤치에 앉아 멀리 북릉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식히고는 했다. 아침 일찍 올 경우에는 여기 중국사람들과 함께 태극권 동작을 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유물을 숨겨두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여긴 사람들이 많이 찾는 데다 곳곳에 유적을 관리하는 안내원과 공안들이 서 있지 않은가? 더구나 지금은 고궁을 보수하느라 곳곳을 파헤치고 있었다. 설령 여기에 숨겨두었다 해도 이 넓은 곳에서 그걸 찾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는 대청문을 지나 곧장 시내 외곽의 북릉으로 향했다.

북릉으로 들어오니 고궁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에 채유정은 잠시 당황했다. 숲이 없이 건축군만으로 이루어진 고궁에 비해, 여기 북릉은 아름다운 숲과 시원한 물이 흐르는 게 마치 숲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 숲과 조화를 이룬 릉의 모습은 장엄해 보였다. 여기는 현존하는 중국 황실 황실무덤들 중 가장 넓은 무덤중의 하나로 황태극과 그 황후의 묘지인 셈이다.

채유정은 조금 더 걸어 북릉 공원 하마비 앞을 지나갔다. 노송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데다, 그 옆으로 넓은 시내가 흐르고 있어 큰 숲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신교라 하는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니 여기부터는 신성한 곳이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채유정은 내를 건너 사찰로 들어서는 기분을 느꼈다. 다리 앞에는 화려한 패방이 보였다. 돌로 만든 석패방인데 정교한 조각과 백수의 왕 사자석상 등 섬세하고 고색 창연해 보였다.

여기는 고궁보다 사람들이 훨씬 적었다. 시내에서 떨어진 곳이라 발길이 잘 미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라면 그 유물을 숨겨두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패방을 지나 정홍문을 들어섰다. 정홍문 입구에는 아치형 문이 세 개 있는데, 가운데는 신만이 지나는 문이고 오른쪽은 임금, 왼쪽은 일반 신하들이 지나는 문이었다. 그녀는 황제가 다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좌우로 마주보고 있는 화려한 돌조각의 화표와, 돌로 만든 상서로운 동물들이 주인을 위해 방성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채유정은 그 돌조각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시선을 딱 멈추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몸을 숙이는 게 보이는 것이다. 오른쪽 해태 모양의 돌조각상 쪽이었다. 그 큰 조각상 뒤로 옷소매 한 자락에 시야에 들어왔다. 일부러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고궁에 있을 때부터 뒷덜미가 서늘했던 것이 자신을 미행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으나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계속 걸어갔다. 융은전을 나와서 월아성 성루에서 내려다보니, 콘크리트에 덮인 거대한 봉분이 보였다. 봉분 중앙에는 잘생긴 큰 나무가 서 있었는데, 황태극과 황후가 신목으로 변한 것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내문의 글귀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줄곧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시선이 마주쳤던 남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며 자신을 몰래 미행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비가 내리려는 지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꼼짝없이 여기서 당할 수도 있었다. 혹시 그들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겨우 진정하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막 내달리려는 데 순간, 어깨에서 강한 손아귀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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