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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녀석이 모처럼 기분 낸다고 아버지 차를 몰래 끌고 와서는 우리를 찾느라고 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주차장이 아닌 문과대 앞뜰에 세워 놓고 그것을 깜박하고는,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세운 줄 알고 거기로 가서 자기 아버지 차와 외형이 똑같으니까 무조건 그 차를 자기네 차로 알고 몰고 온 것이다.

차 주인은 다름 아닌 문과대 학장이었다. 그러니 차문이 열리지 않을 수밖에. 녀석이 학장 승용차를 끌고 나온 사이 학교는 발칵 뒤집혔단다. 다른 차는 멀쩡하게 그대로 있는데 학장 승용차만 감쪽같이 없어지자 아마도 운동권 학생들 소행이라며 경찰까지 출동하여 수색하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우리는 녀석 덕분에 경찰서에까지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나중에 출장 갔다 돌아온 녀석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유치장 신세를 졌을 것이다.

"야, 은행지점장 끝발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다. 금방 감옥에 처넣을 것처럼 눈을 부라리던 짭새들이 너희 아버지가 명함 하나 내미니까 그냥 태도가 180도 달라져서, 아, 예예. 애라, 빌어먹을! 나도 골치 아픈 의대 때려 치고 은행에나 취직할 꺼나?"

노진의 이러한 넋두리에 아무도 응수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좀 전까지도 큰소리 뻥뻥 치던 한철이 녀석까지도. 왜 그랬을까? 모두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 전부 혼들이 나간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라도 있어서였을까?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났을까? 한동안 풀이 죽어있던 한철이 다시 기고만장하여 사과하는 의미에서 한턱을 내겠다나. 모두들 고개를 설레설레 내둘렀다. 녀석 때문에 원래 학교 앞 찻집으로 가려던 발길을 되돌려 다시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다. 녀석을 따라나섰다가 이번에는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영탑지 솔밭 옆 잔디밭에 앉았다. 마침 지나가던 진경이 합류했다. 그런데 어느새 한철이 녀석도 뒤따라 와 앉으려 했다. 진경이 일어서 자리를 뜨려고 하자 한철은 갑자기 무릎 꿇는 자세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어쨌든 두 사람을 화해시킬 절호의 기회다 싶어, 여자들은 진경을 달래고 나와 노진은 녀석에게 다시 한번 따끔한 충고를 하였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누군가의 제안으로, 달빛도 휘영청 밝은데 옛날 풍류객들처럼 시 한 수씩 암송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뭐 그딴 것을 하느냐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했을 한철도 그날은 왠일인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애송시를 읊기로 했다. 먼저 다같이 긴장을 푸는 의미에서 윤동주의 '서시'를 한 목소리를 암송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리고 나서 초희가 맨처음 순서로 입을 열어 시를 읊었다.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이 해 인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오르는 빛

구름이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와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내 마음은

- 김 동 명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언제 들어도 꾀꼬리 같은 목소리였다. 이런 경우에 옛사람들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표현을 썼는가! 모두들 성우를 뺨친다며 칭찬들이 대단했다. 정말로 낭낭하게 암송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청아한 물소리와도 같았다. 그 맑은 물소리에 달님도 내려와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이성부의 '벼'와 황지우의 시를 암송했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넉넉한 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 지 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29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현직 국어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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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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