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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임명의 투명화

우리나라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판사임명제도, 법원 독립성 문제는 영국에서도 논란이 많다.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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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1994년 9월 판사임명 제도상의 여러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새로운 소장 판사직(고등법원 판사 아래에 해당) 임명제도를 도입하였다. 이후부터 소장 판사직 임명에 앞서서 모집공고를 내기 시작했으며, 해당 요건을 갖춘 모든 사람들에게 응모를 권장하였고, 선발과정에 비법조인이 참여토록 하였다.

즉 응모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작성된 단기 명부에 오른 후보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면접 담당관은 세 사람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이때 선발위원회의 세 면접관 중 한 사람은 '순회판사', 또 한 사람은 비법조인, 나머지 한 사람은 대법원부 고위직 공무원으로 구성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 10년 이상의 법정변호사 및 사무변호사 경력이 있는 사람만 선발될 수 있으며, '형사법원 임시판사'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자격요건을 요구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최초의 형사법원 임시판사란 대법원부 측에서 임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장 판사직 선발을 둘러싼 공개적 경쟁이라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이것 역시도 여전히 법조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어쨌든 1998년 2월 영국 대법원부 장관 데리 어빈은 이와 같은 소장 판사직 임명 제도를 고등법원 판사직 임명에까지도 적용토록 하겠다고 발표는 했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영국의 대법원부 장관은 내각의 일원이다.) 그러나 고등법원 판사직 모집공고를 내도록 하며, 후보자들에 대한 단기 명부를 작성하여 3명의 면접관(이 경우엔 소장 판사임명과는 달리 순회판사 아닌 고등법원 판사가 주심이 됨)의 심사를 거치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대법원장관이 반드시 이 면접관들이 선발한 후보를 임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도록 되어 있다.

나아가 고등법원 판사직 임명의 경우 여전히 슬그머니 평판을 떠보는 절차가 계속되고 있으며, 대법원부장관은 고등법원 판사 모집공고에는 아예 응모조차 하지 않은 인사를 임명할 수도 있는 권한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더군다나 대다수의 수석 판사직에 대해서는 아예 모집공고조차 내지 않고 있으며, 이들에 대해서는 영국에서도 계속해서 구 제도에 따라 임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판사의 임명제도를 투명하며 공정하게 위해 민간 요소 도입을 위해 노력한다든지, 더 근본적으로는 변호사 중에서 판사 및 기소자를 임명토록 하는 영국의 제도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판사들의 사회적 배경

영국에서 판사는 주로 어떤 사람들일까? 젊거나 흑인이거나 여성으로서, 말할 때 강한 지방 악센트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큰가, 아니면 백인 남성으로서 그 말씨로 보아 비싼 사립학교를 다녔으며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을 다닌 사람일 가능성이 큰가? 이중 후자야말로 영국의 판사 이미지의 실상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된다.

이는 1997년 7월 영국의 '노동연구'(Labour Research) 지에 발표된 조사결과가 잘 입증해주고 있다. 당시 '노동연구' 지는 690명의 고위급 판사(순회판사급 이상)의 배경과 경력에 대한 조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영국 판사들은 학력 측면에서 여전히 압도적으로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 둘째, 이들은 10년 전보다 평균 나이가 더욱 더 노령화되었다. 셋째, 압도적인 다수가 백인 남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넷째, 이들은 10년 전보다 정치에 관여할 가능성이 더욱 더 커졌다.

영국의 고위급 판사들은 법정변호사급 이상에서 충원된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보았을 때 영국에서 법정변호사가 되기 위한 교육훈련 과정은 법정변호사를 개업한 초창기 여러 해 동안을 살아남을 수 있는 정도로 별도의 개인적 수입원이 있어야만 가능하게끔 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 결과 영국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애당초 법정변호사가 될 가능성을 아예 봉쇄당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법정변호사 및 대다수 판사들은 전체 영국 사회의 극히 협소한 계층 출신일 수밖에 없으며, 그 동선이 매우 세련된 사교계 범위 내에 국한되어 움직이고, 이들은 극소수 특권계층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앞서 1997년 '노동연구' 지의 조사결과를 보면, 전체의 6%에 불과한 41명의 고위급 판사들만이 여성이었으며, 단지 0.7%에 불과한 5명의 고위급 판사들만이 흑인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절대다수에 속하는 82%의 고위급 판사들이 사립학교 출신이며, 88%는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 출신이었다.

한편 정당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25명의 고위급 판사는 소수였지만 이 수치는 매우 의미 있는 비율인 것이며, 14명은 과거 역대 의회 선거에 출마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12명은 프리메이슨 단체 회원으로 확인되었으며, 61명은 두 개의 배타적인 사적인 사교클럽인 가릭클럽(Garrick Club)과 MCC 회원임이 밝혀졌다.

심지어 일부 판사들은 보통사람과는 전혀 접촉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기도 하다. 예컨대 가디언 지 같은 영국 언론에 따르면 고등법원 판사인 하아만은 1998년 당시 유명한 축구선수였던 폴 가스쿠안, 음악밴드그룹인 오아시스,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노라고 말할 정도라고 보도했다.

한편 1996년 당시 1만6438명의 영국 국민들을 대상의 면접조사 방식으로 실시된 '영국 범죄 서베이 조사'(British Crime Survey : BCS, 현재는 설문대상이 약 4만여 명으로 증가했다)에서 80%의 영국 국민들이 판사란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를 전혀 접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으로 본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전혀 놀랄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판사의 사회적 배경은 왜 중요한가?

우라나라도 과거와는 달리 현재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는 이상과 같은 영국 판사의 사회적 특성들은 결과적으로 불가피하게 판사의 가치관이나 시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판사들이 하는 일 처리 방식 그 자체에 대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제대로 알고 공정한 판결을 내릴 줄 아는 능력이란 필시, 그들이 판단하고 판결을 내리는 보통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는 측면 때문에 그르쳐질 수 있다는 것은 과히 잘못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특권을 가진 백인 남성이라는 특성은 예컨대 부유한 계층이나 교육수준이 높은 계층에 대해 동조적인 반면, 가난한 계층 혹은 흑인이나 아시아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판사들의 사회적 배경은 이들을 보수주의로 만들 가능성 역시 매우 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많은 판사들이 보수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새롭거나 급진적인 것, 아니면 옛날 것이거나 이미 해보거나 검증된 것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할 때, 많은 판사들이 후자를 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판사들이 정말 불편 부당한가 하는 측면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사법부 독립론?

국가권력에 대한 삼권분립론과 같은 권력분립 개념에 따르면, 법 위반 여부를 판결하며 위반한 경우 처벌을 가하도록 해야 하는 사법부의 법집행 역할은,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집행부와 입법부와는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법을 위반했다 하여 제기된 고소고발 건들을 검토하며 실제 위반 여부를 판결하는 것은, 집합적으로는 사법부라고 불리지만 사실상 실제 업무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개별 판사들이 하는 역할이며 직무에 속하는 것이 된다.

이때 권력분립 원리가 의미하는 바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나마 사법부는 집행부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독립되어야 함을 뜻한다. 예컨대 판결은 대통령이나 총리나 장관의 지시나 통제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법이 어떻게 입법되고 개정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닌, 법 해석의 문제 역시도 사법부의 역할에 속한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 이 권력분립론이 실제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변수들에 달려 있다.

첫째,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일반적이며 포괄적인 법을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하기 위해 해석하는 일은 판사의 소임으로 되어 있다. 입법부는 법을 포괄적으로 입법하며, 그 실효성은 집행부가 선택하여 집행하는 정책에 의거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정책들 역시도 구체적이며 특수한 기조 아닌, 일반적이며 포괄적인 기조를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입법부가 정한 법과 행정부가 채택한 정책을 개별 사건에 적용해야 하는 경우, 사법부에 속하는 판사는 개별 사건에서 해당 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상급법원에서 법 해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경우 그 후부터 하급법원은 이에 구속되도록 하는 선례의 원칙을 따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상급법원에 속해 있는 상위급 판사는 의회가 입법한 법에 대해서 해석을 통해 사실상의 입법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판사가 이렇게 "사실상 입법하는 바로 이와 같은 법"을 "보통법"이라고 부른다.

둘째, 일정 정도 우리나라 법원도 하고 있는 것처럼 영국에서도 판사는 사법심사를 통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조치들이 적법한지 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런데 바로 이 역할이야말로 명백히 정치적인 기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사법심사 제도 부분에서 따로 살펴보기로 한다.

셋째, 영국의 고위급 판사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집행부와 입법부에서도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한다. 예컨대 우리나라 대법관에 해당하는 영국 법경의 경우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의회의 상원의원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의회의 각종 토론 및 투표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대법원부 장관의 경우 집행부인 내각 각료직을 맡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상원 의장도 맡도록 되어 있어서 의회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결국 각료인 대법원부 장관(집행부 소속)은 입법부의 일원(상원의장) 및 사법부 수장의 직책을 겸직하고 있으며 정부의 3부에 모두 직책을 두루 겸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넷째, 영국의 판사들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정부정책에 관한 토론에 일조하기 위하여 공개연설을 하던지 아니면 언론에 대해 기고문을 발표하든지 해서 관련 사항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현상이다. 한편 논란이 벌어지고 있거나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현안들에 대하여 의회에서 청문조사를 하도록 결정하는 경우가 매우 흔한데, 영국에서는 이때 그 청문조사의 진행 책임자로서 판사를 임명하게 되며, 이와 같은 청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의회가 입법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섯째, 최근 영국이 유럽인권조약을 영국 법체계의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영국 역사상 최초로 판사들이 영국의 국내 입법조치들이 유럽인권조약의 정신과 상충되는 경우 의회 측에 대하여 그와 같은 법에 대한 개정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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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호 기자는 성균관대 정치학박사로서, 전국대학강사노조 사무처장, 국회 경찰정책 보좌관, 한국경찰발전연구학회 초대회장, 런던정치경제대학 법학과 연구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경찰정치학>, <경찰도 파업할 수 있다>, <경찰대학 무엇이 문제인가?>, <삼과 사람> 상하권, <옴부즈맨과 인권> 상하권 등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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