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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문
박해의 문 ⓒ 홍경선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박해의 문'이다. 문은 돌출된 두 개의 기념탑과 가운데 아치형으로 되어있는데 전체적으로 그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여기에 사용된 대리석의 대부분은 3∼4세기경 순교한 기독교인들을 추앙하기 위해 에페스의 원형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맹수에 의해 무참히 찢겨나간 그들의 영혼이 성문위의 들풀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청명한 하늘의 축복해도 불구하고 뜨거운 태양빛에 견디다 못해 누렇게 변해버린 잡초들이 부서진 성문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치형 입구사이로 살며시 새어나오는 하늘의 파란 빛깔이 발걸음을 저절로 옮기게 했다.

입구를 통과하자 눈앞에 견고한 아야술룩 요새가 그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불멸의 콘스탄티노플을 연상시키는 그 모습은 아랍 건축술의 뛰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당당하게 언덕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 아래로 페허가 된 사도요한의 무덤터가 쓸쓸히 놓여있다.

그리스도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받은 사도 요한은 그녀와 함께 이곳 에페스로 오게된다. 이미 이곳엔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하여 에페스의 기독교 지도자가 된다. 이후 노구의 몸을 이끌고 버가모, 서너마 등지의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벌이던 요한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한다. 하지만 로마황제 도미티안의 죽음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되고 다시 에페스로 돌아온 그는 요한복음을 쓰게되고 결국 생을 마감하여 자신의 뜻에 따라 이곳에 묻힌다.

사도 요한의 무덤터
사도 요한의 무덤터 ⓒ 홍경선


이후 6세기경 요한의 무덤터에 거대한 교회가 세워진다. 유스티니안 황제의 명에 의해 세워진 '성 요한 교회'는 6개의 돔과 130m 길이의 십자가 모형으로 설계되었다. 교회에 쓰인 대리석의 일부는 무너진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하지만 무너진 신전의 대리석으로 지었다는 교회 역시 현재는 폼페이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건물벽과 기둥 그리고 받침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가이드 책의 자세한 설명 없이는 사도 요한에 대한 그 어떤 흔적도 알아볼수 없었다. 세월의 흔적은 그렇게 완성됨을 거부한체 해체의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7∼8세기 들어 아랍인의 침략을 받은 이후 사도요한 교회는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하지만 타종교에 관대했던 아랍인들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흔적은 고스란히 유지될수 있었다고 한다. 무자비한 침략자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십자군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평생을 하느님을 위해 살다가 그였지만 그의 흔적을 유지해준 것은 어쩜 기독교인들이 평생토록 싸워왔던 이슬람교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도요한의 무덤은 교회의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이미 알려진대로 성스러운 기독교 성지의 하나로써 성지순례의 일원으로 해마다 이곳을 찾는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지금까지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만약 기술이 발달하여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낸다면 실로 엄청난 성지가 탄생할것임에 틀림없다.

성요한교회와 그 뒤로 보이는 아야술록 요새
성요한교회와 그 뒤로 보이는 아야술록 요새 ⓒ 홍경선


교회터의 부서진 기둥에 올라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뜨거운 태양이 온몸을 태우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강렬했다. 그곳에서 바라본 에게해의 전망은 슬로우모션으로 펼쳐지는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 웅장한 아야술록 요새를 등뒤로 높다란 산맥과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대평원사이로 듬성듬성 자란 풀포기가 짐짓 황량함을 느끼게 했으나 이는 덩그런히 기둥하나만을 남겨놓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에 시선이 꽂히면서부터 이내 사그라들고 말았다. 높이 19m의 기둥이 모두 총 127개나 되었던 거대한 신전이 단 하나만의 기둥만을 남겨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의 흐름은 그렇게 모든걸 페허로 만들어버렸다. 이제는 보잘 것 없어진 옛 흔적들.하지만 끊임없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곳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기독교 역사속에서 찾아볼수 있을 것이다. 이곳엔 사도요한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사도 바울 등 초기 기독교역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중요인물들의 삶이 고스란히 베어있기 때문이다. 6세기 사도요한의 무덤터에 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7개 교회의 지도역할을 담당하며 그리스도의 신앙을 굳건히 지켜오지 않았던가. 역사의 흔적은 그렇게 세월의 모진풍파를 이겨내며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6월에 떠난 두달간의 유럽배낭여행 중 터키 '에페스'에서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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