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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스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께서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 <요한계시록(2:1)>

다도해라 불리는 터키 서부지역의 에게해는 일찍이 트로이, 버가모, 에페스 등 고대도시들의 유적이 살아숨쉬는 곳이다. 또한 성경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금촛대 즉 일곱 개의 교회가 몰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중 인구 300만의 에게해 최대도시 이즈미르에서 80km떨어진 곳에 로마의 소아시아 행정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지였던 고대도시 에페스가 숨쉬고 있다.

성요한 기사단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리스 '로도스섬'을 떠난 페리는 에게해를 가로지르며 터키로 향했다. 고속페리의 빠른 움직임은 선실에서 보여준 미스턴빈의 좌충우돌 소동기가 끝나기 무섭게 터키의 미항 '마르마이스'에 도착했다.

따로 입국비자를 받을 필요가 없었기에 입국수속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입국관리소를 벗어나자 누가 불렀는지 삐끼들이 달려와 저마다의 행선지를 안내하느라 정신이없다. 그중 한명의 안내를 받으며 택시를 타고 오토가르(버스정류장)로 갔다. 오토가르엔 이스탄불, 앙카라, 데니즐리 등 터키의 주요도시들로 향하는 버스들로 가득했다. 일렬로 늘어선 여행사들 또한 큰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중 유난히 다정한 목소리로 '꼬레아'를 외치며 친근감을 표시한 여행사 직원의 소개로 '셀축'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황량한 아나톨리 지방의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오랫동안 유럽의 풍경에 익숙해져서인지 아시아이기도 한 또다른 세상 터키의 풍경은 신기하면서도 낯설었다. 멋들어진 콧수염에 진한 갈색의 피부, 얼핏 봐도 중동인처럼 보이는 그들의 모습 역시 낯선 땅의 이미지를 한층 새롭게 만들었다.

셀축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늦은 밤 10시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언제 왔는지 여행사에서 알선해준 청년이 짐을 꺼내주며 숙소로 안내했다. 아야슬록 요새의 으리으리한 성벽이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한 숙소는 깔끔하고 정갈해보였다. 뜨거웠던 월드컵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유달리 한국인들에게 친절했다. 먼저 다녀간 한국배낭족들이 선물로 주고간 붉은악마 티셔츠와 태극기를 꺼내보이며 환영을 해주는 호텔사람들. 비록 여관급의 시설이었지만 따스한 그들의 미소는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식혀주는 듯 했다.

이미 저녁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빵과 과일등 먹거리를 준비해놨다는 주인의 친절함에 다시 한번 감동하며 전망 좋은 식당으로 올라갔다. 사방을 덮고 있는 깜깜한 밤에 비친 달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누군가 살짝 베어먹은듯한 모양으로 반짝이는 달빛아래 '아야술룩 요새'의 웅장함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달빛과 조명을 머금은 성벽은 한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을만큼 견고해보였다. 그 아래 사도요한의 숨결이 묻어있는 '성 요한교회'가 있으리라.

금방이라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어디선가 사도요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램을 떠난 사도요한과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요한복음을 기술하고 생을 마감했던 바로 그곳이 테라스 아래로 불과 몇미터 앞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늦은 밤 허기진 배를 급히 채운 빵과 과일들은 어느새 피곤을 몰고왔고 결국 지친 몸을 이끌고 내일의 여정을 기대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아침 저절로 떠진 눈은 이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려왔고 느긋한 몸짓으로 터키에서의 첫 일정을 준비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후 사도 요한의 무덤과 교회가 있는 아야술룩 언덕으로 향했다.

이곳 에페스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개의 지도적인 교회들(에페스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관활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요한의 활동중심지였다. 즉 이 도시는 한때 사도 요한이 유배생활을 했던 밧모 섬으로부터 오는 편지의 도착지이면서 동시에 일곱 개의 교회를 차례로 연결하는 도로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 박해의 문
ⓒ 홍경선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박해의 문'이다. 문은 돌출된 두 개의 기념탑과 가운데 아치형으로 되어있는데 전체적으로 그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여기에 사용된 대리석의 대부분은 3∼4세기경 순교한 기독교인들을 추앙하기 위해 에페스의 원형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맹수에 의해 무참히 찢겨나간 그들의 영혼이 성문위의 들풀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청명한 하늘의 축복해도 불구하고 뜨거운 태양빛에 견디다 못해 누렇게 변해버린 잡초들이 부서진 성문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치형 입구사이로 살며시 새어나오는 하늘의 파란 빛깔이 발걸음을 저절로 옮기게 했다.

입구를 통과하자 눈앞에 견고한 아야술룩 요새가 그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불멸의 콘스탄티노플을 연상시키는 그 모습은 아랍 건축술의 뛰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당당하게 언덕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 아래로 페허가 된 사도요한의 무덤터가 쓸쓸히 놓여있다.

그리스도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받은 사도 요한은 그녀와 함께 이곳 에페스로 오게된다. 이미 이곳엔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하여 에페스의 기독교 지도자가 된다. 이후 노구의 몸을 이끌고 버가모, 서너마 등지의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벌이던 요한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한다. 하지만 로마황제 도미티안의 죽음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되고 다시 에페스로 돌아온 그는 요한복음을 쓰게되고 결국 생을 마감하여 자신의 뜻에 따라 이곳에 묻힌다.

▲ 사도 요한의 무덤터
ⓒ 홍경선


이후 6세기경 요한의 무덤터에 거대한 교회가 세워진다. 유스티니안 황제의 명에 의해 세워진 '성 요한 교회'는 6개의 돔과 130m 길이의 십자가 모형으로 설계되었다. 교회에 쓰인 대리석의 일부는 무너진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하지만 무너진 신전의 대리석으로 지었다는 교회 역시 현재는 폼페이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건물벽과 기둥 그리고 받침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가이드 책의 자세한 설명 없이는 사도 요한에 대한 그 어떤 흔적도 알아볼수 없었다. 세월의 흔적은 그렇게 완성됨을 거부한체 해체의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7∼8세기 들어 아랍인의 침략을 받은 이후 사도요한 교회는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하지만 타종교에 관대했던 아랍인들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흔적은 고스란히 유지될수 있었다고 한다. 무자비한 침략자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십자군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평생을 하느님을 위해 살다가 그였지만 그의 흔적을 유지해준 것은 어쩜 기독교인들이 평생토록 싸워왔던 이슬람교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도요한의 무덤은 교회의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이미 알려진대로 성스러운 기독교 성지의 하나로써 성지순례의 일원으로 해마다 이곳을 찾는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지금까지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만약 기술이 발달하여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낸다면 실로 엄청난 성지가 탄생할것임에 틀림없다.

▲ 성요한교회와 그 뒤로 보이는 아야술록 요새
ⓒ 홍경선


교회터의 부서진 기둥에 올라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뜨거운 태양이 온몸을 태우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강렬했다. 그곳에서 바라본 에게해의 전망은 슬로우모션으로 펼쳐지는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 웅장한 아야술록 요새를 등뒤로 높다란 산맥과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대평원사이로 듬성듬성 자란 풀포기가 짐짓 황량함을 느끼게 했으나 이는 덩그런히 기둥하나만을 남겨놓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에 시선이 꽂히면서부터 이내 사그라들고 말았다. 높이 19m의 기둥이 모두 총 127개나 되었던 거대한 신전이 단 하나만의 기둥만을 남겨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의 흐름은 그렇게 모든걸 페허로 만들어버렸다. 이제는 보잘 것 없어진 옛 흔적들.하지만 끊임없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곳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기독교 역사속에서 찾아볼수 있을 것이다. 이곳엔 사도요한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사도 바울 등 초기 기독교역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중요인물들의 삶이 고스란히 베어있기 때문이다. 6세기 사도요한의 무덤터에 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7개 교회의 지도역할을 담당하며 그리스도의 신앙을 굳건히 지켜오지 않았던가. 역사의 흔적은 그렇게 세월의 모진풍파를 이겨내며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6월에 떠난 두달간의 유럽배낭여행 중 터키 '에페스'에서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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