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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 '히틀러의 나치'나 '폴포트의 크메르루즈'와 같은 경우 수백만명이나 되는 생명을 하찮은 종이조각으로 여겼다. 쉽게 찢고, 불에 태우고, 뚫어버리는 등 생명경시란 무엇인가를 철저히 몸으로 보여주려는 듯 그들의 극악무도한 행위는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그칠줄을 몰랐다. 한치앞을 모르는 전시상황에서 생명의 존중을 논하는게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면, 지극히 평온한 일상속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무차별 살육을 저지르는 것은 어떠한가. 물론 같은 인간이 아닌 '동물'의 경우이다.

한때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개고기를 먹는 우리 한국인을 일컫어 야만인이라 욕한 적이 있다. 어릴적 시골에 놀러갔었을 때 인근 저수지에서 우연히 개를 잡는 장면을 목격했다. 몇몇 사람들이 망태에 집어넣은 개의 목을 동아줄로 묶은후 커다란 나무에 걸어 몽둥이로 사정에서 내려치고 있었다. 개패듯 팬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순간 불을 붙여 굽기 시작했다. 불은 금방 타들어갔고 몽둥이세례를 받은 개는 그렇게 화염속에서 서서히 익어갔다. 아무리 식용으로 기른 개라지만 실로 원시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 '불루라델로'들의 활약
ⓒ 홍경선
그로부터 십여년이 흐른 어느날 난 또한번 원시적인 살육의 현장을 목격했다.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성 아래 등에 창이 잔뜩 꽂힌 검은소가 피를 둑둑 떨어뜨리며 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빨간망토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를 자극하고 있었다.

성난 소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미친 듯이 날뛰었고 마치 메트릭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듯 그 남자는 이리 저리 잘도 피했다. 이윽고 소는 체력이 한계에 달했는지 가쁜 숨만 내쉴뿐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했다. 그사이 남자의 손에 예리한 칼이 들려지고 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진듯 조용해졌다.

▲ 성난소에 의해 공격당하는 '삐카도르'
ⓒ 홍경선
바로 그때 눈깜짝할 사이 남자의 칼이 정확의 소의 목을 뚫고 심장에 박혔다. 소는 한순간에 무너져내렸고 붉은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장내는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는 물론 환호성으로 떠날 듯 했다. 두시간여동안 그렇게 무려 세 마리의 소가 같은 방식으로 죽어나갔다.

이는 서양인의 눈에 비친 야만적인(?) 한국인의 시선으로 묘사된 스페인의 국기 '투우'(CORRIDA DE TOROS)의 한 장면이다. 무어인에 의해 전해진 투우는 17세기까지 기사와 귀족의 여흥을 위한 궁중 오락거리였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초 부르봉왕조 시대에 이르러 서민의 경기로 격하되면서 현재와 같이 일반인에게 보급된 것이라 한다.

▲ 공격당하는 '삐카도르'
ⓒ 홍경선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두가지를 나열하자면 당연 '투우'와 '플랑멩코'를 들 수 있다. 그만큼 투우는 스페인 사람들의 최고 오락거리이자 전세계 관광객들이 꼭 한번 관람하고 싶은 경기이다. 까딸루냐주의 주도 '바르셀로나'에서 투우경기장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두 검지손가락을 이마에 댄 채 "또루! 또루!"라고 바디랭귀지를 하니 친절하게도 자세히 설명해준다. 매사에 정열적인 스페인 사람들인만큼 외국인에게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다.

▲ 단창의 명수 '반데리예로'
ⓒ 홍경선
침이 얼굴에 튀길만큼 정열적인 설명으로 쉽게 도착한 아레나(투우경기장)에는 경기 시작 이 얼마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티켓이 있었다. 티켓은 좌석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데 그 기준은 경기장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그늘인지 아닌지에 달려있다고 한다. 물론 돈없는 배낭족인 나의 경우 당연히 제일 싼 티켓을 구입했다.

커다란 경기장엔 이미 많은 투우팬들로 가득했다. 온몸을 달구는 뜨거운 햇살못지 않게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열기 또한 뜨거웠다. 다행이 썬크림으로 중무장한지라 마음놓고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 '마카도르'의 화려한 몸놀림1
ⓒ 홍경선
어느덧 6시 경기 시작 시간이 되자 커다란 팡파르 소리와 악단의 연주와 함께 장내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멋들어진 음성의 아나운서의 소개와 함께 이날 출전하는 마따도르, 반데리예로, 삐까도르 등이 장내에 들어서자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잠시후 경기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페네오'에 의해 문이 열리자 시커먼 소가 미친 듯이 뛰쳐나왔다.

순간 관중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엄청난 근육으로 다져진 소의 멋진 모습은 경기장을 뛰어다닐 때마다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어쩌다 넘쳐나는 힘을 주체할 수 없는지 경기장벽에 머리를 박는다. 그럴때마다 쿵하는 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메아리되어 울렸고 관중들은 소의 육중한 힘에 놀라 그저 탄성만 이을 뿐 할말을 잃었다. 처음 소가 이렇게 날뛰는 이유는 경기투입 하루전에 24시간동안 완전히 빛이 차단된 암흑의 방에 갇혀있다 갑작스럽게 빛을 보기 때문이란다.

▲ 마카도르의 화려한 몸놀림2
ⓒ 홍경선
'카포테'라고 하는 빨간 천을 든 '불루라델로'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에게 장난을 건다. 그럴때마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소를 매끄러운 몸놀림으로 피하거나 때론 경기장의 방어벽으로 숨는다. 이럴때면 어김없이 아무도 없는 벽에 머리를 들이댄 채 발질질을 한다. 멀찌감치 떨어진 소를 향해 다시한번 다가서는 '불루라델로'들은 서로 협공하여 소의 방향감각을 무색케하는 작전을 펼친다. 마치 서로 이리오라는 듯이 조롱을 하며 소의 성질을 돋구다가도 이내 소가 돌진해오면 쏜살같이 도망가거나 날렵한 몸놀림으로 피하곤 한다. 그럴때마다 관중들은 어김없이 박수를 보낸다.

▲ 1:1 대결 긴장의 순간
ⓒ 홍경선
'불루라델로'들이 이리저리 카포테를 휘날리며 소의 정신을 빼놓고 퇴장하자 이번엔 육중한 철갑을 두른 말을 탄 '삐카도르'가 한손에 긴 창을 들고 등장했다. 두명이 한조를 이루어 소의 등을 창으로 찔러대려 하는데 소의 두꺼운 가죽은 좀처럼 뚫리질 않았다. 바로 그때 빈틈을 노린 노련한 소는 그 엄청난 파워로 말의 철갑을 들이받았다. 넘치는 소의 힘을 당해내지 못한 말은 결국 코너로 몰리게 되었고 당황한 '삐카도르'는 계속해서 소의 등을 찔러댔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세게 몰아붙이는 소에 의해 한순간 '삐카도르'의 말이 들어올려졌다. '아차'하는 그 순간 '삐카도르'의 몸이 공중위로 치솟더니 이내 경기장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때를 놓치새라 덩치큰 숫소가 쏜살같이 달려와 그를 덮쳤다. 눈앞이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소에 의해 짓밟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상하나 입지 않은 채 방어벽 너머로 달아났다. 자칫 대형사고가 터질뻔한 순간이었지만 주변에 있던 '불루라델로'들이 카포테로 소를 유인해냄으로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 최후의 일격
ⓒ 홍경선
다시 재정비를 한 '삐카도르'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다시금 돌진해오는 소를 방어벽으로 유인한 후 사정없이 등을 내리찔렀고 이윽고 소의 목과 등부위에서 붉은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의 근육을 찔러놓은 채 퇴장하는 '삐카도르'의 뒤를 이어 등장한 투우사는 3명의 단창잡이들로 구성된 '반데리예로'였다.

'삐카도르'에 의해 찢어진 어깨근육의 상처는 결국 소의 움직임을 둔화시켰고, 힘이 빠진 소 앞에 '반데리예로'가 '불루라델로'들의 카포테를 방패삼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순간 장내에 긴장이 흘렀다. 누구든지 먼저 공격하는 자가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데리예로'의 몸놀림은 소의 생각보다 더욱 빨랐다.

▲ 칼과 창에 의해 난자당한 소
ⓒ 홍경선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뛰어올라 소의 등에 깃발이 달린 두 개의 창을 내리 꽂은 것이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방어벽으로 달려가는 '반데리예로'를 향해 성난 소가 돌진했지만 이미 방어벽안으로 숨은 뒤였다. 그렇게 세명의 '반데리예로'에 의해 소의 등엔 무려 6개의 단창이 꽂히고 말았다.

경기장의 모래바닥은 소의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선혈로 낭자했다. 하지만 소심줄 마냥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소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흥분해 날뛰며 계속해서 '불루라델로'들을 향해 돌진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관중들도 덩달아 흥분하며 마지막 주자이자 주인공인 '마타도르'의 이름을 연신 외쳐댔다. 경기장 바닥이 선혈로 낭자해질때마다, 또 붉은 카포테가 휘날릴때마다 관중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체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했다.

▲ 최후의 일격에 쓰러진 소
ⓒ 홍경선
드디어 관중의 호응에 부응이라도 하듯 '마타도르'가 검과 '물레타'라고 하는 막대기에 걸치듯이 감은 붉은 천을 들고 등장했다. 순간 장내에는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쏟아져나왔고 본격적으로 거의 미쳐 버린 소와 '마타도르'와의 최후의 결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릴적부터 전문적으로 투우사 교육을 받아온 이들이어서 그런지 '마타도르'의 몸놀림은 예술 그 자체였다. 제자리에서 멈춰서서 돌진해오는 소의 뿔을 물레타로 쓸어올리며 한바퀴 돈 후 다시 반대편으로 소를 유인하여 곡예를 펼치듯이 살짝 피하는 기예를 선보이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경기장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돌진해 오는 소의 뿔을 물레타로 쓰다듬으며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그의 화려한 개인기와 날렵한 몸놀림에 관중들은 연신 '올레∼'를 외치며 열광했다. 또한 신기에 가까운 그의 몸놀림앞에 몇 백kg이 넘는 육중한 소의 저돌적인 공격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 마지막 숨통까지 끊다.
ⓒ 홍경선
어쩌다 가끔씩은 묘기를 펼치다말고 관중들에게 박수를 요구하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 여유롭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여지없이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고 소는 어이없다는 듯 그저 바라만보고 있었다. 그렇게 교묘하게 몸을 비틀면서 소를 다루기를 약 20분, 장내의 흥분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마타도르'는 멈춰섰다. 그의 움직임이 정지하자 일순간 소란스럽던 장내도 조용해졌다. 정적과 팽팽한 긴장감만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고요한 경기장안엔 생사의 갈림길에 선 '마타도르'와 '소'만이 서로를 주시하고 있을뿐이었다. 어느틈엔가 그의 손엔 예리한 검이 들려있었고 여전히 소와 마주한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긴장의 순간은 마치 어릴적 보았던 '황야의 무법자'의 한 장면같았다. 먼저 쏜 자만이 살 수 있는 죽음의 경기마냥 '마타도르'의 예리한 검과 하늘높이 치솟은 소의 뿔 둘중 누가 먼저 서로에게 꽂힐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오직 그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그 둘만이 알뿐이다.

▲ 승자의 여유
ⓒ 홍경선
굳게 쥔 두 주먹에서 땀이 배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도, 등줄기에도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숨죽이며 바라보는 관중들의 뜨거운 열기와 경기장을 비추는 뜨거운 태양에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려는 순간 드디어 '마타도르'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쳐 땀을 다 닦아내기도 전에 승부는 끝이 나고 말았다. 소가 미쳐 움직이기도 전에 '마타도르'의 검이 정확히 소의 목을 뚫고 심장에 박혀버린 것이다.

그렇게 30여분동안 펼쳐진 한편의 투우는 분수같이 뿜어져나오는 소의 피와 함께 끝이났다. 승리감에 도취한 '마타도르'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성원을 보내준 관중에게 답례를 했고 이에 열광하는 관중들은 연신 '브라보'를 외치며 위대한 승리자를 칭송했다.

▲ 승리의 기쁨
ⓒ 홍경선
그 사이에 소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듯 몇몇 투우사들이 단검으로 소의 숨골을 찔러댔다. 마지막 순간까지 칼에 찔려 경기장 바닥을 피로 적신 소의 최후는 너무나 끔찍했다. 곧이어 마차가 다가와 축 늘어진 소를 매단 채 경기장을 한바퀴 돌고 난후 퇴장했다. 그렇게 경기장 바닥을 붉은 피로 물들이며 비참하게 끌려나간 것이다. 소가 떠난 자리엔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끔찍했던 순간도 잠시뿐 이내 빗자루로 깨끗이 훑어 버린후 또다른 투우경기가 시작되었다.

세명의 마타도르가 출연하여 각가 두 마리씩 총 6마리의 소와 싸우는 투우경기. 투우장에 등장한 소는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다. 최후의 순간까지 비참하게 피를 질질 흘린 채 죽어가야 하는 것이다. 붉은 피를 보며 관중들은 흥분한다. 물레타의 붉은 망토에 흥분해 소가 날뛰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이 흥분을 하는 것이다.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경기장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광란의 도가니가 되고 만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한편의 대살육극을 지켜보며 흥분에 겨워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 경기장을 한바퀴 돌며
ⓒ 홍경선
단 두시간동안 무려 6마리의 소가 모두의 구경거리가 된 채 피를 쏟아내며 죽어갔다. 그 누구도 이에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에 겨워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두시간 동안 펼쳐진 피의 축제를 나무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목축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의식으로 출발했다는 투우.

하지만 잔인하게 뿜어나오는 피의 향연에 열광하는 정열적인 스페인 사람들을 가리켜 그 누구도 야만인이라 부르며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를 야만인이라 불렀던 '브리짓 바르도'까지도. 이 어찌 아이러니컬한 문화적 사대주의가 아닐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지난 2002년 6월에 시작한 두달간의 유럽 배낭여행중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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