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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 전경
ⓒ 홍경선

대전망탑에서 내려다본 하이델베르크의 전경은 마치 들고있는 그림엽서 속의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반투명한 하늘과 중세의 흔적이 배어있는 골목, 그리고 붉은 고성의 옛 정취가 물씬 풍겨나오는 구시가지 너머로 짙은 녹색으로 우거진 숲이 펼쳐져 있다. 숲과 성 사이로 흐르고 있는 거센 물결의 넥카강 위엔 철학자의 길로 향해 쭉 뻗어있는 '칼테오도르 다리'가 놓여있다.

철학자의 길 양옆으로 어릴적 레고를 이용해 만들어보았던 예쁜 모양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하나같이 만화 속에서나 봄직한 모양이었다. 파란 지붕에 갈색 창틀, 빨간 지붕에 녹색 창틀, 하얀 벽, 넓은 정원, 창문 사이로 살짝 놓여진 화분,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 넝쿨등...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오후 4시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눈 앞에 펼쳐진 수려한 경관 속에 빠져보기 위해 서둘러 성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역시 중세영화에서나 봄직한 건물들로 가득했다. 골목마다 들어서 있는 고풍스런 건물들. 성으로 향하는 모든 길, 적어도 구시가지 안에만 들어서면 우린 곧 중세로의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한참동안 중세로 이어진 기나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강 건너 철학자의 길로 이어진 '칼테오도르 다리'에 도착했다. '옛다리'라 불리는 '칼테오도르 다리'는 넥카강에 걸려있는 다리들 중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칼 테오도르가 1786∼1788년동안 개축하였다는 것에서 이름이 붙여진 이 다리를 이곳 사람들은 '옛다리'라고 부르며 그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 칼테오도르 다리
ⓒ 홍경선

다리의 입구에는 중앙의 입구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흰색의 쌍둥이 탑이 세워져 있다. 둥근 돔 모양의 지붕과 선명한 하얀색 벽이 인상적인 쌍둥이 탑문은 외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방어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다리 위에는 이 다리를 만든 테오도르상과 아테나 여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성은 그 웅장함을 드러냈다. 비록 곳곳에 보수와 파괴의 흔적이 산재했지만 주변을 둘러싼 산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흔히들 '칼테오도르 다리' 위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기념사진 찍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한다. 실제로 중앙의 하얀 쌍둥이 탑에 초점을 맞춘 채 우측에 높이 솟은 교회의 첨탑과 후미의 하이델베르크성을 양념 삼아 카메라 앵글에 담으면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제 이 다리를 지나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로 향한다. 하이델베르크의 산책길로 알려진 이 길은 실제로 괴테, 헤겔,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거닐며 사색에 잠겼던 곳으로 유명하다.

철학자의 길로 향하는 입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특별히 입구를 따로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인근에서 공사중인 한 인부에게 물어보니 산기슭에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산기슭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많은 관광객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고 나니 어느덧 산중턱에 당도했다. 그곳에 작은 벤치가 놓여있었다. 너무 급하게 올라와서인지 숨이 턱까지 차는 것을 벤치에 앉아 진정시켰다. 어디선가 살랑이는 바람이 다가온다. 상쾌한 공기를 폐 속까지 깊이 들이 마신 뒤 다시금 철학자의 길을 찾아 올라갔다.

수풀이 우거진 계단을 밟으며 서서히 철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철학자의 길은 얼핏 보면 그저 보통의 여느 산책길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은 뭔가 특별함을 부여했다.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에선 조금씩 사색의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당대 철학가들의 향기가 전해지면서 서서히 그 사색의 무게가 깊이를 더해갔다.

산 정상에 나있는 넓은 길에는 많은 벤치가 놓여있었다. 뒤로는 수풀이 우거져있고 앞으로는 멀리 넥카강 너머로 하이델베르크성이 그 웅장하면서도 외로운 외관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깊은 숨소리와 함께 담배가 타들어 가는 소리마저 들릴정도로 주위는 고요했다. 뿌옇게 흩어지는 담배연기 사이로 살며시 하이델베르크성의 붉은 외관이 들어온다.

산 속에 홀로 서있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무언가 고립되어 보이는 그 모습에서는 애처로움마저 묻어 나온다. 그 아래로 오랜 중세의 흔적을 넘어 칼테오도르 다리가 이어져 있다. 잠시 눈앞에 펼쳐지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한 채 허공에 진한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연기를 뚫고 다시금 사색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성
ⓒ 홍경선

철학자의 길을 걷고 있노라면 조용한 발걸음은 어느덧 괴테의 발걸음이 되어 우주와 인생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된다. 신과 세계를 하나로 보려는 범신론적 세계관이 형성되는가 하면, 한 인간의 생애가 전 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관념론적인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사색을 할지도 모른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취임한 헤겔이 그래왔던 것처럼.

존재를 향한 끊임없는 사색은 어떠한가? 하이데거가 그랬던 것처럼 철학자의 길에는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동일선상의 물음이 녹아있다. 이 길은 어쩜 존재자들을 저마다의 존재자로 존재하게 하는 특이한 공간일수도 있다. 그 공간을 걷고 있는 나는 실존하는 시간 속의 존재였다. 또한 1921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심리학 교수에서 철학 교수로 전임한 야스퍼스 역시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조용히 낙엽을 밟으며 유유히 흐르는 넥카강을 바라보며 철학적 사색을 통해 인간 근원의 존재를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철학자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실존과 초월자와의 만남을 통해 형이상학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철학자의 길을 걷다보면 사색과 성찰을 통해 오래된 길동무를 만날 수 있는 내면의 지름길로 향할 수 있다. 또한 당대 철학자들의 흔적을 밟으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고즈넉한 하이델베르크의 분위기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사색에 잠겨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그렇게 걸었을까? 어느덧 그 지름길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그와 같은 사색으로 인해 무거워진 발걸음이 힘에 겨워 잠시 벤치에 앉았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칼테오도르 다리를 지나 남쪽으로 펼쳐져 있는 구 시가지와 하이델베르크 성이 유난히 멋들어져 보인다. 오랜 사색으로 그 깊이가 더욱 깊어진 것일까. 성의 대전망대에서 맡았던 중세의 향기는 멀어진 채 새로운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짙게 풍겨오는 철학적 향기를 맡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그 자리를 떠날 줄을 모른다. 시간마저 정지해버린 듯 하다. 혼자 있어도 혼자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곳, 중세의 어느 시간에 멈춰버린 듯한 도시 하이델베르크는 철학적 사색의 깊이마저 더한채 오늘도 변함없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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