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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한국 여성과 결혼한 필자는 한국에서 직장(경희대 러시아어 전임 강사)이 있고, 2년 이상 살았기 때문에 1999년 2월부터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현행 귀화법률에 따르면, 한국인 배우자를 가진 외국인은 직장과 주소를 가지고 2년 이상 한국에서 살면 한국인이 될 자격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내가 귀화를 결정한 이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해서 한국인 배우자와 함께 한국에서 2년 이상 산 모든 외국인들이 다 한국인이 되려고 귀화 신청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이다. 필자는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 러시아 국적을 포기할 것을 각오하고 귀화 신청을 한 것이다.

아무리 세계주의·인류 보편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해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자란 국적을 자기 손으로 버린다는 것은 심적으로 고역이었다. 국적에 대한 국가주의적 애착이 없었다 해도 러시아에 계시는 부모를 뵈러 갈 때 비자 수속을 밟아야 된다는 것에 약간 슬픈 기분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귀화의 길을 택했을까. 처음 귀화 신청서를 내밀었을 때 몇 가지 의식적인 동기가 있었다.

바로 한국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인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과 국적과 혈통을 동일시하는 많은 한국인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한국과 혈통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한국인이 되고 싶어 한다면, 과연 한국인이라는 것이 '핏줄'에 의해서만 결정지어지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언젠가 늙었을 때 경주 남산과 같이 산 좋고 계곡이 시원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욕심도 필자의 귀화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현실적인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학술 회의 참석 때문에 유럽을 자주 가는 필자에게는 방문지마다 비자를 필요로 하는 러시아 여권보다 비자를 받을 필요 없는 한국 여권이 훨씬 편리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행 편리'를 위해서만 국적을 바꾸는 고역에 몸을 내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는 인간인 이상 현실적인 손익 계산을 전혀 안 했을 리가 있었겠는가. 이러한 측면을 덮어두고 '고상한 이상을 실천했을 뿐이다'라고 자부만 한다면, 자기 기만과 독선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한국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 재산, 신원조사 그리고 '산유화'

주저함을 떨쳐 버리고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귀화 신청서를 낸 날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다. 만감이 교체되는 필자와 대조적으로 신청서를 처리하는 법무부 직원은 무덤덤했다. 필자에게 유일하게 물어본 것은, "불법 체류자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신청서와 함께 제출된 재직 증명서를 읽고 나서도, 이와 같은 질문을 왜 꼭 해야 했을까. 일단 '남'이자 '외국인'인 상대방에 비해서 자신의 위치가 높고 당당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욕구의 발로였을까. 분명히 불법 체류자가 아닌 필자에게 이처럼 따질 정도면 불법 체류자들을 과연 어떤 식으로 다루겠는가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필자가 제출해야 할 서류 중에는 필자와 배우자의 은행 통장, 그리고 전세 계약서 사본이 들어 있다. 재산이 일정 금액(지금의 기억으로 3천만 원) 이상 되어야 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현행 귀화법률의 특징 중 하나다.

전문직에 있으며 처가집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필자는 이 '좁은 문'을 다행히 통과했지만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으로의 '귀화'를 엄두도 못낼 것이다. 아무리 극단적인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국가라 해도 사회적 약자를 걸러내는 국적 취득 조건을 노골적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서류를 제출한 몇 개월 뒤에 전화가 왔다. 귀화 신청과 관련돼서 신원조사를 실시해야 하니 관할 경찰서 외사(外事)계에 한국인 배우자와 함께 출두하라는 연락이었다. 신원조사는 러시아와 같은 구 사회주의 국가 출신에게만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귀화 신청자에게 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한국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귀화의 '통과 의례'중 가장 힘들고 지겨운 것이었다.

담당 경찰의 지시에 따라서 몇 시간 동안 전 인생의 과정을 기술하는 서류도 친필로 작성해야 했고, "북한 사람을 만난 일이 있었느냐", "아내가 될 사람을 어떻게 만났느냐"와 같은 질문에 반복해서 대답해야 했다. '우리의 관례니까 제발 참아달라'고 속삭였던 아내의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필자는 아마도 이 고역을 참지 못해 중간에 벌떡 일어서서 귀화를 포기했을 것이다.

북한에 가보지도 못한 필자에 대해서 신원 조사가 이 정도로 심했다면, 북한에 갔다 온 일이 있는 귀화 신청자는 과연 어떤 종류의 고역을 당해야 하는가. 그리고, 지금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는 외사계 직원이라고 자기 소개한 사람이 영어를 왜 전혀 못했을까 라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면 외사계 사무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그는 경찰서 외사계가 아닌 다른 특수 관청의 파견 직원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몇 개월이 더 지난 뒤에, 필자가 드디어 결정적인 '귀화의 관문'인 귀화 시험에 들어갔다. 한국학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 봐도, 그 시험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문제에 정확하게 답하려면, '노동법', '판사', '재판' 등의 어려운 한자 계통의 고등 어휘를 구사할 줄 알아야 했다. 그것도 모자란 듯이, '산유화'의 저자가 누구냐는 질문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김소월을 모르는 자가 한국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논리인 셈이었다.

결국, 이 시험을 무사히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필자처럼 한국학을 전공으로 했던 구미 지역의 출신이나, 한국에서 오래 살았던 한자 문화권 출신 (예컨대, 화교나 일본인) 정도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보는 바로 앞에서, 이 시험에서 떨어진 파키스탄·나이지리아 계통의 노동자들은 실망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시험장을 떠났다.

이와 같은 시험을 실시하는 의도 중에서 저학력의 비(非) 구미·비(非) 극동 출신의 귀화 신청자를 걸러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자연히 던지게 된다.

시험에서 통과된 며칠 뒤에, 필자는 과천의 종합 청사에서 국적 취득 증명서와 함께 태극기를 받았다. 위에서 기술한 바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엄숙하게 진행된 국적 취득 의식에서 아시아·아프리카 노동자들의 거무스름한 얼굴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몇 사람의 파키스탄의 출신들이 있었지만 국적 취득자의 대부분이 평생 한국에서 살아 온 그리고 상당 수준의 재산과 완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춘 화교들이었다. 귀화 신청자가 통과해야 할 갖가지 '여과'들 -특히 일정액 이상의 재산 보유 기준과 한국어 시험- 이 사회의 약자들을 걸러내는 데에 상당히 주효했던 셈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계급적 차별과 억압을 위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믿지 않은 순진한 사람이 있으면 위와 같은 귀화 과정을 거친 뒤에 분명히 마르크시즘에 타당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것이다.

지금도 아픈 마음을 안고

물론, 필자의 한국 국적 취득은 한국 국적 증명서 증정 의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앞으로의 '숙제'로 남아 있었다. 6개월만에 원래의 국적(러시아)을 포기하지 못할 경우에는 어렵게 취득한 한국 국적이 자동 소멸되는 것이 현행 국적법 규정이다. 만약 1년 6개월만에 국적을 포기하면 다시 간단한 국적 재취득 절차를 통해 한국 국적을 복귀할 수 있다.

이 같은 규정은, 이중 국적 상태를 방지한다는 원칙을 지키는데 매우 체계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의 법 체계는 이중 국적에 대해서 상당히 적대적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군사 독재가 많이 악용했던 전통적인 '국가에의 충성' 관념, '통합된 국민'의 국가주의적 이상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충성'의 대상이자 통합의 주체가 둘이라면, 국가주의적 세계관으로서 매우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중 국적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현행 국적법은 필자에게 적지 않은 고통으로 작용했다. 국적 포기 절차가 매우 까다로운 러시아에서는, 6개월만에 국적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1년 6개월만에 간신히 '원래 국적 포기 증명서'를 노르웨이 주재 한국 공관에 제출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미 소멸된 한국 국적을 거의 '극적으로' 다시 취득할 수 있었다.

이제 필자는 한국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를 포함한 '우리'의 문제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쁘다. 그러나 까다로운 규정과 귀화 시험, 그리고 원래 국적을 일정 기간 내에 포기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한국인이 되는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많은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국도 필자가 지금 살고 있는 노르웨이처럼 일정 기간 동안 거주한 외국인에게 별다른 '시험'이나 재산·신원 조사 없이 국적 취득의 혜택을 부여하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으로 인해 한국인으로 귀화할 수 있는 나라의 출신(예를 들면 아프리카, 아시아)들이 폭넓어 지면 한국사회와 문화는 자연히 더욱더 다양해지고 사회는 한발 더 앞으로 나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박노자 기자는 오슬로대학 교수(노르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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