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명동최고 상권을 구가하던 1976년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근처 모습. 보행자로 꽉찬 도로 가에 신발 등의 간판이 보임.
서울역사박물관
1970년대 명동은 당시 유행을 선도했다. 일제 강점기 형성된 금융과 소비재 등 중심상권에 더하여 옷과 신발, 미용이 결합한 형태였다. 최고로 비싸다는 땅값과 함께 백화점, 맞춤옷의 양복점과 양장점, 최고급 신발 가게가 공간을 지배한다. 테일러와 유명 여성복매장이 화려한 쇼윈도로 지나는 젊은 남녀를 유혹한다. 말 그대로 패션 1번지였다.
패션의 완성은 구두다. 멋과 유행을 따르려는 젊은 숙녀와 신사는 명동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최고급 살롱화에 열광했다. 이런 경향이 한세대를 이어왔으나, 1980년대 후반 밀려온 값싼 기성화 파고를 넘어서진 못했다. 1990년대 후반 청담동 등으로 유행과 패션 주도권을 넘겨주면서 패션 1번지라는 명동의 명성마저 저물어 갔다.
낡아 해어진
성수동은 지금 낡아 해어진 구두를 닮아있다. 여러 번의 시련이 이 공간을 흔들어 댔다. 그때마다 꿋꿋한 장인정신과 동류의식으로 뭉치고 견뎌냈다. 그러함에도 빛나던 화양연화는 황혼처럼 저물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낡고 해어진 흔적만 남아 흔들리고 있다.
변화와 시류에 적응하지 못해서였을까. 난마처럼 얽혔으나, 낮은 공임 몇백 원 인상에 산사태처럼 무너져내리는 취약한 산업생태계의 구조적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최종 납품가의 5∼6배수에 책정되는 구두 가격을 놓고, 원청 기업이나 백화점 등 상위포식자들이 승냥이처럼 찢어발겨 생겨난 현상일까.
카페와 인쇄, 사무공간 등 다른 업종에 자리를 내어주고 점점 야위어 가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그러나 말이 없다. 마지막 잎새라도 지켜내려 몸부림치는 장인의 망치질 소리와는 달리, 수제화 거리엔 겨울로 접어드는 스산한 바람만 불어온다.
1960년대 후반 K 사가 생산공장을 확장 이전한다. 이전지는 당시로선 서울 외곽이던 금호동이다. 70대 초반엔 E 사와 또 다른 E 사가 성남으로 이전한다. 이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가죽 등 재료를 취급하는 업체는 물론 구두를 제작하는 기술자와 노동자가 같이 이전해 와, 성수동 수제화 공간이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