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
조우성
2022년 5월 8일, 그는 강원도 원주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모습으로 이승을 떠났다. 80의 세수여서 장수한 편이지만, 긴 옥고와 잦은 병치레 그리고 거듭된 포폄의 파란많은 생애였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작가) 씨와 차남 세희(토지문화재단이사장 겸 토지문화관장) 씨가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동학도, 아버지는 남로당, 본인은 저항시인 그리고 변신작가, 굴곡진 근현대 인물사의 한 축이고, 그만큼 고통과 질곡이 따랐다. 7년 6개월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만큼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었다.
사유의 세계는 끝없이 넓었고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시인ㆍ사상가인가 하면 민중광대ㆍ풍류객이었다. 1980~90년대 문화계 일각에서는 재야인사 백기완ㆍ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3대 구라'로 불렸다. 조소가 아니라 박학다식하고 현하지변이어서 붙여진 애칭이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타는 목마름으로>, 1연)
대낮에
마당 복판에 갑자기
참새 한 마리 뚝 떨어져
머리 피투성이로 파닥이다 파닥이다
금세 죽어 숨진다
아내가 부삽으로 흙에 파묻고
장터 가려는 내 길 막고 서서
몸 부르르 떤다. - (<그 새, 애린32> 전문)
치열한 저항시와 빼어난 서정시를 함께 쓸 수 있었던 시인이었다.
<논어>에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특정한 그릇이 아니다"는 풀이 그대로였다. 시ㆍ서ㆍ화ㆍ창에 두루 조예가 깊고, 광대와 사상가로서 오지랖이 넓어 자주 구설에 올랐다.
자연인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의 인생을 살았지만 '시인 김지하'의 언어는 한 시대의 전범이자 한국문학의 역사로 우뚝할 것이다. (주석 1)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를 이해하는 데는 〈흰 그늘의 길〉이 최상이라. 그의 여성 대통령 대망론은 변절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파탄이다. 그의 독설은 '좀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빚어낸 말장난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석 2)
김지하는 1980년대 중반을 마디절로 하여 종전의 외적 발현, 대결, 투쟁, 공격의 양(陽)적 세계를 수렴, 화해, 포용, 통일의 음(陰)적 세계와 통합하여 유기적인 생명의 균정세계를 열어나간다. 그의 이러한 문학적 변모는 죽임의 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응전과 저항의 대립 구도에서 죽임의 세력까지도 순치시켜 포괄해내는 '생명의 문학 재건'이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단계로 심화ㆍ확대된 것으로 파악된다. (주석 3)
지하는 현실의 부조리와 세계의 모순을 혁파하고 참된 인간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사상을 일으킨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중국 등소평이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어요. 나라를 세운 건국의 공로가 크지만 문화혁명이라는 치명적인 과오를 남겼잖아요. 그래서 공칠과삼(功七過三), 공은 7이고 과는 3이라고 평가하고 넘어갔어요. 그렇게 보면 김지하 시인은 공구과일(功九過一), 공이 9 과가 1이라 할 것입니다. (주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