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가톨릭시보·작가회의
1970년에 김지하 시인이 발표한 <오적>에 이은 그의 일련의 시작(詩作)과 문예활동은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기도에 정면저항하는 메시지를 국내외에 던지면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시와 노래, 판화와 전통 민중연희(탈출, 마당굿 등)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새로운 문화운동 형식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 속에서도 생명력을 이어온 민중의 가락, 춤사위 등을 민주화운동에 접목시키는 작업이었음을 국내외의 문화예술인들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망국, 식민지배, 전쟁, 분단, 독재, 가난의 대명사처럼 되어있던 한국, 그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생명의 외침, 가락이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주석 7)
고인과 민주화투쟁의 연고가 깊었던 함세웅 신부는 추도사에서 생전의 인연을 소개하고 덧붙인다.
그 후 그는 너무 다른 길로 멀리 갔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저는 헤겔의 정반합(正反合) 원리를 기초로 김지하의 삶을 다음과 같이 종합합니다.
명 제 : 우리는 30대 청년 시인 김지하를 마음에 품고 예찬하며 기립니다.
반명제 : 후반기의 김지하, 그 일탈과 변절을 단호하게 꾸짖고 도려냅니다.
종 합 : 죽음을 통해 이제 그가 신의 반열에 들었으니, 청년 김지하의 삶과 정신을 추출해 그의 부활을 꿈꾸며 민족공동체의 일치와 희망을 확인합니다. (주석 8)
고인이 '죽음의 굿판'을 기고했을 때 민족문학작가회의 간부로서 매섭게 비판했던 김형수 시인은 추도사에서 "내가 아는 김지하 시인은 늘 강고한 자기 존엄의 정점에서 살았는데, 그러나 그 때문에 개체의 나약함은 없었는가 싶을 때마다 인간의 영혼이라는 광야가 너무 넓고 커서 슬프고 무서웠다."면서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