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김용초등학교 채의진이 다니기도 했던 이 곳은 폐교 후 현재는 도농교류센터로 바뀌었다.
박기철
정부의 은폐 시도 와중에도 미군은 이미 가해자가 한국군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별도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 기록이 1997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다.
이 문서는 당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 준장의 서한철 중 일부였다. 여기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석달마을 주민들을 소총과 유탄발사기, 수류탄, 총검 등으로 학살했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문서에서는 석달마을 주민들을 빨치산 내통자로 의심할 근거가 적으며 오히려 두 번이나 군경의 작전에 협조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1950년 2월 15일 미 극동군사령부의 비밀전문(NO 2176)에는 해당 사건의 책임자는 기소되어 처형될 것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뒤이어 한국군은 이 사건을 숨기길 바라고 있으며 한국 언론들도 해당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도 사단장과 연대장을 해임했을 뿐 법적 처벌은 없었다.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
1960년 4.19 혁명 이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유족들의 진상규명 목소리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곧이어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이런 목소리를 반국가 행위로 규정한다. 채의진은 수배자가 되었고 조카와 다른 유족들은 구금된다.
수배령 해제 이후 채의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21년 간 영어 교사로 재직한다. 하지만 원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1986년 교사를 그만두고 진실규명에 뛰어든다.
채의진은 누군가가 억울함을 풀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퇴임 후 한국해양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한국군이 민간인을 죽인 이유를 물어보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입구에서 가로막혀 결국 만나지 못했다.
1983년, 서울에서 채씨 친족 모임이 있었다. 이들은 석달마을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11대 국회의장이 된 채문식도 참석했다. 사람들은 채문식의 국회의장 취임을 축하했지만, 채의진은 학살사건을 모른 체하는 채문식에게 분노했다. 그는 채문식을 향해 '정부의 개'라고 소리치며 간장을 부어버린다.
이후에도 여러 번 정부에 진실규명을 요구했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언론에도 수 차례 제보했지만 역시 관심을 보여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미국 언론에 사건 보도를 요청하기 위해 < UGLY SOLDIERS >라는 영문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실제 보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채의진은 이처럼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증거를 찾고 정리했다.
사건의 전말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에 육군 본부는 '전사 자료 미보유로 확인 불가'라는 무책임한 답을 반복했다. 그러자 채의진은 1995년에 직접 가해 부대를 찾아냈고 이를 <시사저널>의 정희상 기자가 보도한다. 앞서 말한 미군의 사건 조사 기록도 1997년에 채의진이 직접 미국에 가서 가져온 것이다.
채의진은 석달마을 사건을 넘어 전국 차원의 민간인 학살 진실 규명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는 자신들의 사건 해결에만 집중하는 유족들을 설득하여 활동가들과 연결시켰다. 비록 직선적인 성격으로 마찰도 있었지만, 채의진의 이런 노력은 민간인 학살을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인권 유린 문제로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정부와 정치들에게는 매우 성가신 것이었다. 많은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은 정치인들에게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채의진은 그러지 않았고 가해자인 국가를 준엄하게 꾸짖으려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피해자다운 모습'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