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 합동묘역 국가의 탄압을 기억하기 위해 당시 훼손하여 묻혔던 비석을 다시 발굴했다. 비문을 썼던 이은상은 당국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때문에 비문을 쓰지 않았다고 부인하기도 했다.
박기철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는 국가
수십 년간 이어진 유족들의 싸움은 기억 투쟁이자 인정 투쟁이었다. 국가가 자국민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로 1995년 12월, '거창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된다. 2004년 10월에는 사건 현장 일대에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완공된다.
특별법과 추모공원으로 인해 사람들은 거창 사건이 완전히 해결됐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특별법에는 유족들에 대한 피해 보상이 빠져 있었다. 결국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1심 재판에서는 유족들이 이겼다. 하지만, 2심 재판에 이어 2008년 대법원까지 모두 유족들이 패소한다. 패소 사유는 공소시효의 만료였다. 유족 측은 특별법 제정 이후부터 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소시효는 사법부가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손해 배상 소송에서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이유였다.
사법부는 학살 부대 지휘관들이 유죄판결을 받았던 1951년부터 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들을 곧바로 사면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주일 대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군으로 복직하거나 경찰 간부로 특채됐다. 이렇게 가해자들이 다시 권력의 품 안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어떻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까? 형식적이었던 과거의 유죄 판결이 훗날 손해배상 청구 기각의 근거가 됐다.
국제인도법에는 중대한 전쟁 범죄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이 원칙을 반영한 판결은 거의 없었다.
정부와 사법부, 국회의 섬뜩한 핑퐁게임
공소시효를 근거로 국가의 손을 들어주던 사법부가 또 하나 반복하는 것이 있다. 유족들을 위해 국회에서 피해보상이 들어간 특별법을 만들라는 권고를 판결문에 덧붙이는 것이다. 그래야 사법부가 그 법을 근거로 피해보상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는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보상 법안 처리를 이미 수 차례 미뤄왔다.
이렇게 정부와 사법부, 국회가 핑퐁 게임을 하는 동안 수많은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은 지쳐가고 체념하며 세상을 떠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국가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아닌지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