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선 당시 KBS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장면엔 상당한 비중을 들였던 반면 평민당 김대중 후보에겐 인색했다.
KBS
김대중 후보는 전국 주요 도시의 유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부산 수영만 유세에는 50만 명의 청중이 모이고, 대구에서도 수 만명이 참석했다. 부산 유세 때는 일부 청중의 소란이 일어나고 숙소에서 난동사건이 벌어졌다. 대구집회에서도 방해를 받았다. 이같은 사태는 다른 후보들도 비슷하게 겪었다. 김영삼 후보는 폭력사태로 광주연설을 중단하고, 노태우 후보도 계란세례를 받았다.
김영삼의 광주 유세 때 그에게 돌멩이를 투척해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 공작을 주도한 사람은 보안사령부 H처장(준장)이었다. …H씨는 87년 대선 때 보안사 본부에서 김모 소령을 광주에 직접 내려보내 돌멩이 투척사건을 지휘하도록 했다. (주석 7)
노태우가 선거 4일 전에 여의도 유세에서 "88올림픽을 치르고 난 다음에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한 전격적인 제안도 보안사에서 만들어 준 방안이었다. (주석 8) 이처럼 국가 정보기관이 선거에 투입되어 각종 공작과 정책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는 전국 각 지역의 유세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후보자들 가운데서 전국 어느 곳에서든 유세를 못한 일이 없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에 대한 지지는 전국적으로 고른 것이다. 현지 지구당위원장의 준비 여하에 따라 청중 수의 차이는 있었지만 나에 대한 강렬한 지지열기는 어느 곳에서든 높았다." (주석 9)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선거전은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1노 3김' 의 세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노태우측은 두 김씨 후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단일화되는 일이 없도록, 이른바 세력균형을 유지하도록 선거전략을 구사하면서 찬조연사들과 당홍보물을 통해 김영삼후보에겐 여자문제ㆍ능력문제 등을, 김대중 후보에겐 신의문제, 과격이미지 제고 등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안정이냐 혼란이냐" 를 내세워 야권 후보가 집권하면 정국이 혼란에 빠질 것처럼 각종 여론 매체를 동원하여 선전했다. 특히 김대중에 대해서는 어용언론과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용공 음해를 일삼았다. 김대중의 부산유세 때는 "좌경후보 김대중, 붉은 행동 열 가지" 라는 불온 유인물을 대량 살포하기도 했다.
투표 하루 전날에는 통일민주당에서 "김대중 후보 민주대연정에 참여할 듯" 이라는 내용의 당보 호외를 만들어 살포하려다 평민당원들에게 적발되어 압수되었다. 또 김대중 후보가 사퇴했다는 기자회견 내용을 담은 유인물이 전남북지방에 대량 살포되었다. 이것은 정보기관에서 양김을 이간시키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