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그러나 부정선거는 대부분 묻히고 말았다.
투표 결과가 참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태우가 유효투표의 36.6%인 828만 2,738표를 얻어 당선되고, 김영삼은 28.0%인 633만 7천여표, 김대중은 27.0%인 611만 3천여표, 김종필은 8%인 182만 3천여표를 얻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3위에 불과했다. 서울에서는 4명의 후보 중 1위를 차지했지만 예상했던 경기도 등에서는 저조한 득표에 그치고 말았다.
패배의 원인은 야권분열과 정부의 관권개입과 천문학적인 선거자금살포, 여기에 박정희 - 전두환정권 25년 동안 김대중 후보에게 덧씌워진 용공음해와 과격성 등이 때마침 벌어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과 김현희의 압송으로 빚어진 공안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평민당은 좌절의 늪에 빠졌다.
김대중 후보는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김영삼과 후보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자신이라도 사퇴할 것을, 그렇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러나 단일화가 되었으면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에는 의문을 달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선거에 입후보했던 일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국민의 염원을 먼저 생각하고 내가 양보해야했다. 야당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염원을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솔직한 심경으로 반성하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단일화를 했어야 이길수 있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당은 정치자금을 독점하는 한편 야당에 돈이 유입되지 않도록 철저히 체크를 했던 게 우리의 실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매스컴이 여당을 지지하고, 야당에는 주간지 하나도 지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마지막 투개표에 관한 모든 부정을 대통령이 임명한 공무원들이 맘대로 조작할 수 있다면, 야당이 아무리 후보를 단일화 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실 1963년과 1967년에도 야당의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 후보 한 명 뿐이었다. 1971년에도 대통령 후보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야당에서는 후보 한 명을 밀었는데도 모두 졌다. 이번에는 두 명이 나온 탓에 졌다고 한다면 한 명 때는 왜 졌는가? 역대 정부는 후보가 한 명일 때든 두 명일 때든 관계없이 그에 맞춰 부정을 저지르면 되는 일이었다.
김대중은 선거 패배 직후 한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진솔하게 당시의 심경을 토로했다.
나는 여의도나 보라매공원에서 보여준 엄청난 국민의 함성과 나와 함께 서너 시간씩 카퍼레이드를 할 때의 열기 등등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선거의 결과가 저렇게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나는 출마할 때도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나는 기도 속에서 출마하는 것이 옳다는, 출마가 불가피하다는, 즉 나에 대해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한 맺힌 소망을 생각할 때 출마가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출마 전후와 선거 과정을 통해 김영삼 총재와 나 둘 중에서 한 사람이 나가는 단일화가 되도록 내 자신이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은 그 점에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나에게 기회를 주시리라 믿었는데, 결과가 그렇게 못돼서 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냐 하는 반성을 크게 했습니다.
주석
10> <동아일보>, 1987년 12월 16일.
11> <김대중자서전(2)>, 218쪽.
12> 이상문, 김대중 인터뷰, <참 부끄럽게 됐습니다>, <월간경향> 198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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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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