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장사형장 입구와 내부 모습.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수 많은 사람들에게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리던 본 나무도 죽고, 대신 어린 나무가 옛 모습을 재연하고 있음.
이영천
해방 이틀째인 8월 16일 독립운동가와 경제사범이 건국준비위원회 주도로 석방된다. 일반 사범은 사형수와 장기수가 주동, 17일 옥문을 부수고 출옥한다. 종적을 감춘 일본인 간수 대신, 소수 한국인 간수들이 무기고와 여성 옥사를 지킨다. 남성 수감자들이 모두 출옥하자 여성 수감자들을 출소시킨다. 18일부터 일본인 간수들이 미군사령부 명령으로 업무에 복귀한다.
미군정이 성립된 9월부터 감옥 사무도 점차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안정은 친일 분자의 재활용이었다. 서대문형무소도 마찬가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를 기화로 친일파들이 대거 권력 전면에 등장한다. 이때부터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공산주의자로 몰려 잡혀간다. 1947년 노덕술에게 심문당한 김원봉이 대표적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선 1946년 가을 수감자들에 의한 파옥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부수립 후 수감자가 대거 증가한다. 반공을 표방한 이승만이, 친일파를 앞세워 권력에 반기를 든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까지 공산주의자로 둔갑시켜 탄압한 결과다. 제주 4·3과 국회프락치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많은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이 월북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사흘째, 서대문에 수용된 사상범 등 8782명 죄수가 석방된다. 반대로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남한의 지도자를 가두었고, 이들은 대부분 북한군 후퇴와 함께 납북되는 처지에 처한다. 서울이 수복되자 북한 부역자와 협력자들이 다시 대거 수감 된다. 민족의 비극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공간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