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모습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의 100년전 일제 강점기 때 모습. 현재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
서울역사박물관(부분편집)
1904년에 이르러 일본에서 차관을 빌어다 가까스로 입학생을 선발한다. 조선어·한문강독·작문시험을 거쳐 만17∼25세 젊은이 80명(공과 50, 상과 30)이다. 교과에 농업을 추가해 학교는 예과 1년, 본과 3년의 4년제 '농상공학교'로 변신하여, 외국인 전문 교관을 초빙하는 등 열의 있게 출발한다. 공학과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해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나라 운명은 풍전등화였고, 전문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한제국이 의도한 교육계획은 을사늑약으로 인해 급속히 일제에 흡수되어 버린다. 일제는 '우민화 바탕의 황국신민화와 단기 교육을 통한 식민본국의 지원인력(단순기능인) 양산'이란 교육목표를 세운다. 식민지 경영을 뒷받침할 하급 인재 양성이 주된 목표다.
일제에 장악 당한 교육
1900년 대한제국 학부에서 초빙한 관립고등학교(경기고) 외국인 교사였던, 시데하라 다이라(幣原 坦)라는 인물을 주목해 보자. 이자는 1904년 '한국정쟁지'라는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에서, 조선 선비 결사체(朋黨)와 각 당끼리의 논의(黨議)를 '분열적 붕당정치와 음험한 당쟁'이라 격하시킨 최초 인물이기도 하다.
이 자가 1905년 통감부 지시를 받아 입안한 〈한국교육개량안〉 기조는 '한국인의 황국신민(동화주의)화 및 우민화'로 집약된다. 동화주의 핵심은 일본어 교육이다. 소학교 때부터 일본어를 가르치고, 초등교사 양성소인 사범학교에서 일본어 교수를 이수토록 하는 조치다.
차별을 통한 우민화는 학제 개편이 바탕이다. 하급 인재 양성이라는 우민화 목표를 구현하려는 시데하라의 계획은 '수업 연한 단축, 학제와 과정의 단순화, 고등교육 유보, 인문교육보다는 단순 기능교육에 치중'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은 1906년 제정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1911년 〈조선교육령〉 공포 이전까지 식민지 교육의 근간이 된다.
보통학교령 학제는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바꾸면서 시작된다. 본디 5∼6년제 소학교가 4년제 보통학교로 격하되었고, 이 외에 수업 일수, 학년·학기제와 교과과정 등을 일제 입맛에 맞게 바꿔버린다.
공업전습소
을사늑약 후 대한제국 모든 정책이 일제와 친일 세력에게 장악된다. 이때 광무(鑛務) 및 철도학교, 우무(郵務) 및 전무(電務)학당 등 신교육기관이 폐지되는 운명에 처한다. 농상공학교도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해 보지도 못하고, 1906년 세 분야로 쪼개지는 운명을 맞는다. 황국신민화와 우민화라는 교육개량안 원칙에 따른 조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