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훈 교수가 5년간 거제 대우조선에서 사무직 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오월의봄
-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대안으로 기술 기반의 혁신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조금 더 설명을 해달라.
"부산·울산·경남은 죽으나 사나 제조업을 해온 지역이다. 앞으로도 그 자원과 경험과 인프라를 기반으로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무슨 관광특구로 당장 전환하긴 힘들지 않겠나. 그래서 기술 기반으로 혁신을 해야 한다는 거다. 이 지역이 가진 역량은 결국 제조업 기반의 기업들과 공과대학들이다. 이 인프라를 활용해야 한다.
세운상가가 메이커스페이스로 진화해가는 것처럼 마산도 봉암단지 같은 곳들에는 공구상가들도 많고 베테랑 엔지니어들, 장인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곳에 일자리를 만들고 창업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현대자동차가 내연기관에서 전기차와 수소차로 전환하고 있는데 그러려면 같이 협력을 해나갈 전기장치 업체들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없으면 독일 같은 해외에 나가서 부품을 사오거나 아니면 수도권에 시설 투자를 한다. 지금까지는 기술 개발을 할 수 있는 인프라나 인재들이 수도권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도 지금까지 중화학기업들, 현대자동차나 GM 같은 회사들과 함께 일했던 기업들과 네트워크가 있다. 이곳에서 청년창업, 기술기반 창업을 유도하고 뒷받침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제조 역량이 구축돼 있고, 경험이 누적돼 있는 곳이다. 우스개로 축구골대 무너지면 용접할 수 있는 사람이 지천인 동네다."
-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입지 선정 때도 구미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적극적으로 구애에 나섰지만 결국 용인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쓸 때만 해도 구조적으로만 생각했다. 수도권으로 다 빨려 들어가는 단단한 구조부터 깨지 않으면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 거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터질 수도 있다고 본다.
가령, 미국 시애틀이 언제부턴가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테크 스타트업의 천국이 됐는데, 시작은 마이크로소프트가 본사를 옮긴 거였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시애틀로 갈 때 여건이 좋아서 간 게 아니라 그냥 빌 게이츠 고향이라서 간 거다. 가고 나서는 지역 대학들에 대규모 투자도 하고 엔지니어들, 직원들도 지역 대학들에서 뽑았다. 그러면서 인재들도 몰려들고, 아마존과 스타벅스를 비롯한 유수의 기업들도 뒤따라 자리를 잡으면서 혁신 클러스터가 형성 된 거다.
서울에 이어 판교도 비싸지면 기업들도 대체재를 찾게 될 텐데, 물론 편리한 길은 조금씩 조금씩 남하하는 것일 테지만 아예 배경이 다른 곳에서 과감하게 도전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스웨덴 예테보리나 말뫼도 조선업이 쇠퇴한 뒤에 오래된 공장 주변에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를 할 수 있는 사이언스파크를 조성해 기술 개발과 창업을 뒷받침했다. 우리도 경남처럼 산업 기반과 제조 역량 그리고 사람들의 기술 숙련도가 축적돼 있는 곳들에서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 여성 취업을 늘리는 건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이명박정부 때 강만수 산업은행회장이 고졸 고용과 여성 고용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적이다. 당시 대우조선도 산업은행이 관리하고 있어서 엔지니어(사무직)를 포함해 사무직 공채 때 여성을 30% 가까이 뽑았다. 그때 뽑힌 여성들을 추적조사 해보니 대부분이 지금까지도 문제없이 잘 다니고 있더라. 육아휴직을 하더라도 다시 돌아와서 일을 해나가고 있다. 여성들을 많이 뽑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여성 엔지니어를 안 뽑았던 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쁜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정규직 자리가 없으면 여성들을 지역에 붙잡아두거나 또는 오게 할 수 없다. 이게 키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결국 좋은 일자리에 여성을 얼마나 채용하는지가 지역의 혁신 역량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생산직도 마찬가지다. 미국 자동차 공장들을 보면 자동차 조립 라인에 여성들도 많다. 우리나라도 정규직들이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는 아르바이트하러 오는 여성들이 많다. 여성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사무직이나 기술직에서는 차별을 둘 이유가 없다고 본다. 여성 고용을 늘리기 위한 어퍼머티브 액션(차별 해소를 위한 적극적 조치), 할당제를 정책적으로 해도 된다고 본다. 공대 안에서 여성 비율이 가장 작은 기계공학과조차도 여성들이 20% 정도를 차지한다면 회사에서도 여성 엔지니어를 그 정도는 뽑아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