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대선예비후보 캠프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이 지난 13일 최재형 캠프 사무실에서 '최재형 예비후보 일가 친일 주장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최재형 캠프 제공
김종혁 본부장은 13일 최재형 후보의 증조부 최승현과 조부 최병규의 독립운동 이력과 월남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부와 증조부는 해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지주계급이었음에도 (북한 공산당에게) 그동안의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토지를 몰수당하지 않았다. 반탁운동을 벌이다가 소련군이 체포를 하려고 하니까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만주에서 강원도 평강으로 돌아온 과정과 해방 이후 월남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않은 해명이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180도 다른 설명이 담겼다.
필자(최영섭)의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온 전답과 임야가 있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서 땀 흘려 모은 부동산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임야를 포함해서 약 200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낙엽송 약 40만 주를 심어 놓은 임야를 가지고 있었다. 대대손손 땀 흘려 일군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재형 캠프는 '북한 공산당에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토지몰수를 당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최재형 후보의 부친은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고 기록했다.
최재형 캠프가 만주로 함께 이주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설명한 증조부 최승현은 만주 여행 사실은 있을지언정 만주로 함께 이주한 사실은 없다. 만주로 이주한 이는 1938년에 만주로 먼저 간 조부 최병규와 1940년 뒤따라 만주로 간 최병규의 부인 그리고 최영섭·최응섭·최호섭 삼형제 등이다. 이들이 평강으로 돌아온 시점은 1944년 12월이었다.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최영섭의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설명이 다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갔다는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되기 8개월 전에 왜 먼저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그 이유가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또한 '최병규가 반탁운동을 벌이다 소련군의 체포를 피해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했다'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 역시 부친 최영섭의 기록으로 반박 가능하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의 월남은 1947년 2월 일이다. 북한에서 반탁운동이 벌어졌던 때는 1945년 말과 1946년 초였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이 북한에서 은밀하게 반탁활동을 지속하다가 발각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 중 하나인 최영섭의 회고록엔 그와 같은 언급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 이유도 전혀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의 행패와 압력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북한에 계속 있자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병규 독립유공자 표창' 등 <바다를 품은 백두산> 속 최영섭의 기록이 사실과 다르게 쓰여진 점을 고려했을 때, 최영섭의 증언이 실제와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병규 회고록엔 왜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 전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반탁운동으로 인한 체포 위협 때문에 월남했는지' 기술돼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해명을 후보자 캠프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증대상 ②] 딱 최병규만 꼬집어 주거제한형?... 강경애-서정주 사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