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군 고삽면 세포리에 세워진 선만이민훈련소(매일신보, 1938. 7. 30) 일제는 조선인의 만주 개척 참여를 위한 이민훈련소 설립을 추진하였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조선총독부 외사과는 기후와 풍토가 만주와 똑같은 곳으로 평강을 지목했고, 훈련소 건립을 위해 약 4만 원의 보조금도 지원하면서 건립됐다.
매일신보
일제는 1936년에 이르러 만주 개척의 기치를 내걸면서 일본인의 만주 이민을 넘어 조선인의 만주 이민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8년부터 일제가 주도하는 조선인 만주 이민이 본격적으로 실현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당시 만주 신징(新京)에서 <만선일보> 정치경제부장을 맡고 있던 친일인사 홍양명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인의 모험 도강으로부터 개시된 과거 수십 년 전의 자유이민 시대를 지나 통제적으로 이민을 지도하는 계획이민 단계에 처하야 만주국 정부가 소화 11년에 칙령에 의한 만선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야 총독부 당국과 협력하야 만주이민의 보호통제를 하고 있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삼천리 제11권>, '대륙진출의 조선민중, 만주국에서 활약하는 그 현상', 1939. 1. 1)
일제의 만주 개척을 앞두고 선만척식주식회사가 세운 선만이민훈련소(鮮滿移民訓練所)가 조부 최병규의 고향이기도 한 평강군 고삽면(세포리)에 들어서게 됐다. 조선총독부 외사과는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만주와 기후·풍토가 똑같은 곳으로 평강을 지목했고, 훈련소 건립을 위해 약 4만 원의 보조금도 지원했다.
1938년 7월 30일 발행된 <매일신보>에는 세포이민훈련소에 관한 사진과 개소식 소식이 실렸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7월 28일 열린 개소식 행사엔 총독대리 송 사무관과 김시권 강원도지사, 만주국 모리적정사 사무관, 최형식 평강군수 등이 참석했다.
초창기 선만이민훈련소를 경영한 선만척식(주)는 조선총독부령 제45호(선만척식주식회사령)에 근거해 1936년 9월 9일에 설립된 특수회사였다. 선만이민훈련소는 '조선인의 만주이민을 지도할 중견 청년을 훈련할' 목적으로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기관이었다.
이민훈련소 운영은 일제의 계획보다는 많이 늦어졌다. 1937년 5월 1일부터 훈련생 교육을 시작한다는 계획이 해를 넘긴 1938년 1월에야 현실화됐다. 4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출된 109명(혹은 105명)의 1기 수료자는 길림 지역으로 보내졌다. 2기는 1938년 3월 15일에 입소해 7월 24일에 65명의 수료자를 배출했고, 3기생은 1938년 8월 5일에 150명이 입소하는 등 300명의 중견 청년 지도원을 양성한다는 계획은 그럭저럭 실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