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선을 앞둔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김대중과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 모습.
연합뉴스
누군가 필자에게 한국의 정당정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한 장면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3당 합당(1990.1)을 꼽을 것이다. 그 사건으로 호남은 하루아침에 고립됐다. 또한 '민주자유당'이라는, 개헌 저지선을 훌쩍 뛰어넘는 괴물 야당이 탄생했다. 대권욕에 눈먼 김영삼(YS)의 군부 세력(노태우와 JP)으로의 투항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민주당에서 신민당으로 이어진 전국적 선명 야당의 기치와 의미를 붕괴시켰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지긋지긋한 지역주의와 불신의 정당정치가 정치 갈등의 맨 앞에 서게 됐다.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의 거목인 양김(兩金:김영삼·김대중)은 한편 적지 않은 공통점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자칭 확고한 '의회민주주의자'였다. 물론 당시의 의회민주주의라는 푯말은 군사정권이 국시(國是)로 내걸었던 반공주의와 명확한 차이를 드러내 주는 동시에, 당시 여망이었던 자유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들은 실제로도 엄격한 의회주의자들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그들이 대통령이 된 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일이 자신들의 국정 목표 또는 대통령의 의제(presidential agenda)를 관철하기 위한 '입법'에 있었다는 데 있다.
YS와 DJ의 경우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YS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던 뚝심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6개월 만에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시행(1993.8.12)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의회를 우회한 대통령의 긴급재정명령권 발동이 왜 의회민주주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까닭은 국회의 재무위원회(8.18)와 본회의(8.19)에서 대통령이 승인을 요청한 관련 명령안을, 자유토론 끝에 여야 합의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서생(書生)의 문제의식, 상인의 현실감각'을 강조한 DJ는 개혁적 실용주의의 표본이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이후 통과시킬 법률 15가지를 메모해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가지고 다녔는데, 그 중 첫 번째가 국가인권위원회 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인권위법의 통과는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장애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관료적 저항에 있었다. 대통령 서슬이 시퍼런 임기 초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법무부는 인권위를 특수법인의 민간기구로 설립하고 법무부 산하로 두는 법안을 밀어붙였다. 줄다리기 끝에 시민단체 및 야당과의 협력을 주문했던 대통령의 설득으로 법무부 안은 폐지됐고 '합의제 독립기구'를 규정한 관련 법의 통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 출범 3년 만에 설립(2001.3)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제출과 폐기 반복하는 개혁법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