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석교 상판(정지용 생가)시인의 생가에서 문학관으로 나가는 담에 사립문을 달았다. 그 앞으로 실개천이 흐르게 하고, 그 위에 황국신민서사비로 썼다는 널돌을 뒤집어 얹어 다리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무시로 비석으로 사용한 이 널돌을 밟고 지나도록 했다.
이영천
옥천에는 또 하나의 청석교가 있다. 복원된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생가에 있는 통 널판 돌다리다. 일제강점기 시인 고향에 있는 죽향초등학교 교정에 '황국신민서사 비'로 세워졌다는 널돌이다.
시인 생가 뒤 문학관으로 나가는 길목에 작은 개울을 만들었다. 이 널돌을 뒤집어 개울 위에 얹어 '청석교 상판'이라 이름 하였다. 어린 학생들이 아침 조회시간마다 외워야했던 황국신민서사가 새겨진 널돌을, 지금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향토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빛나는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대표적으로 모든 국민이 몇 구절은 외우고 있는 '향수'라는 시가 있다. 노래로도 만들어져 아직도 즐겨 부른다. 주옥같은 시어에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는, 잊힌 고향에 대한 정서를 잘 담아냈다. 시인은 현대시 개척자로 혹은 현대시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킨 시인으로 칭송받는다.
시인 추천으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청록파 쟁쟁한 시인들이 등단하기도 했다.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시인들이다. 하지만 정지용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 기억에서 잊히거나 지워져 있었다. 좌익계 문학인으로 6.25때 월북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 자신 스스로를 무척 부끄럽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한 듯하다. 시인은 1942년 2월 친일문학지인 <국민문학> 4호에 '이토(異土)'라는 시를 발표한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찬양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다. 시인은 이 시를 발표하고선 곧바로 은거해 버린다. 그동안 활발하게 활동하던 모든 일을 접는다. 아마 스스로에게 절필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해방 후 '조선시의 반성'이란 글을 통해 이때의 잘못을 고백한다. "친일(親日)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山水)에 숨지도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는 내용이다. 참으로 수줍고 부끄러우면서,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식민지를 살아낸 무기력했던 보편적인 지식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친일문학 선봉에 섰으면서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은 미당 서정주와 비교해 보라. 사물에 대한 인식, 역사를 대하는 자세와 태도,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 등 모든 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기억에서 거세되었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