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보 시비만석보 시비 전북 정읍시 이평면 배들평야 만석보 유허지. 동진강이 시작되는 둑 위에 서 있는 양성우 시인이 쓴 '만석보' 시비다. 대 서사시로 1894년 1월 조병갑 목을 베고자 일어선 고부봉기와 만석보가 헐리게 되는 역사 서사가 긴장과 축약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이영천
아니다. 시인이 피 끓는 젊은 시절을 살아낸 고단했던 길에, 오히려 숙연했었다. 4.19혁명 때인 1960년엔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제적을 당한다. 호남지역에서 고등학생 반독재 연맹을 주도했다는 죄목이었다. 압제의 칼날이 시퍼런 1970년대엔, 몸을 아끼지 않고 반유신·반독재의 맨 앞줄에 시인이 서 있었다.
몇 차례 필화사건도 겪는다. 교직에서 해직 당하고,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한다. 1979년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1980년 광주에선 시인의 행적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으나, 어디선가 뭔가에 처절하게 임했으리라 짐작한다.
유신폭압에 맞서 문인들이 결성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맡아,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도 맡았다. 그야말로 펜과 온몸으로 불의와 반칙, 독재와 반동에 처절하게 저항한 시인이었다. 그는 자기 시처럼 시대와 역사가 내린 짐을 당당하게 떠안았다. 문학이 가진 힘과, 현실 실천의 힘을 골고루 겸비한 살아있는 예술가였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1997년 이후 시인의 행적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아니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별로 알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 옳은 답일 것이다. 관심이 없어졌다. 미루어 상상하고 짐작할 일이다.
하기야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다른 길에 들어서서 궤변을 늘어놓은 사람이, 시인만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부지기수였고 지금도 부지기수다. 곡학아세(曲學阿世)요 자기부정이며,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다. 생존해 계시는 시인에게, 나 같은 장삼이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뭉툭하면서 단단한 고막천 널돌다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학을 닮아 있어 고고하고, 곱게 나이 든 산처럼 중후하기만 하다. 다리 밑으론 맑은 물이 변하지 않고 묵묵히 오늘도 흐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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