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 출판기념회 걸개그림
이승철
황태성, 서울에 나타나다
1946년 10.1항쟁으로 박상희는 진압 경찰의 총을 맞고 바로 선산경찰서(당시 구미역전에 소재) 옆 벼논에서 사살당했다. 그러자 황태성은 망명도생으로 곧장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상 부상(차관급)까지 지냈다.
박정희와 황태성의 첫 만남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1년 5월 16일, 북의 황태성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남한의 실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깜짝 놀라면서 반가운 마음에 스스로 남북평화통일을 꾀하는 밀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북한의 언저리 사람들이 만류하자 '살 만큼 살았다'고 말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김일성의 승낙을 받은 뒤 당시 북한 공작원의 루트인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나타났다.
그는 남쪽에 안착한 뒤, 구미에 사는 조귀분씨를 만나 그분의 사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박정희와 연계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미 CIA 정보요원의 촉수에 걸려들었다. 이 정보를 알게 된 당시 민정당의 윤보선 대통령 후보는 이를 대통령 선거쟁점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이 건곤일척의 선거에서 윤보선의 패착으로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이 됐다.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황태성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미 CIA 요원들이 현미경처럼 황태성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로서는 어떻게든 황태성 문제를 매듭 지어야만 했다. 황태성을 비밀리에 다시 북으로 돌려보내기에는 이미 때를 놓쳤다. 그때까지도 미국은 박정희의 지난날 좌익 연루 경력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을 때였다.
대통령 선거 후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에게 황태성 사형을 즉각 집행하자고 건의했다. 곧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승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처음 박정희는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도 인간적인 배리로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해 연말 김형욱은 다시 박정희에게 황태성 사형 집행승인서를 내밀었다.
"꼭 사형시켜야 하나?"
"각하, 우리가 미국과 야당에게 몰리지 않으려면…"
박정희는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봐, 형욱이 자네가 알아서 해."
박정희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드리워진 레드콤플렉스를 지워야 했다. 1963년 12월 14일 오전, 황태성은 인천 근교의 한 군부대에서 총살당했다.